전성인 < 홍익대 교수 / 경제학 >

금융대란은 없었다.

투신사의 공사채형 수익증권에 대한 실질적인 환매 가능일인 지난 10일은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평온한 투신사 환매창구를 바라보며 대다수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듯하다.

어떤 경제관료는 이를 "금융시장 안정대책의 승리"로까지 승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금융시장 한 구석에는 이상한 현상도 보인다.

투신사 직원들은 시장전체 차원에서의 환매가 없다는 데에는 안도하면서도
내심 자기 회사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환매요구가 쇄도하기를 은근히 고대
하는 눈치다.

그들은 왜 환매를 고대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이번 안정대책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투신사 안정대책의 경제적 비용중 가장 많이 거론된 것은 손실분담과 공적
자금 투입의 무원칙성이었다.

"자기 책임하에서 투자한다"는 기본 원리를 거스르고 정부가 덜컥 공적
자금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동안 이미 충분히 지적됐으므로 여기서는 적시의 수준에
그치기로 하자.

투신사 안정대책의 또다른 경제적 비용은 채권시장안정기금이 초래하는
문제점이다.

원래 이 기금은 환매자금을 급히 마련하려는 투신사의 유동성 압박을 해결해
주기 위해 창안됐다.

그러나 현재 이 기금은 채권금리를 실세보다 낮게 유지함으로써 투신사등
채권보유 금융기관에 인위적인 자본이득을 창출해주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두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정부가 언제까지나 저금리를 인위적으로 유지할수 없으므로 언젠가
이 체제는 붕괴하고 금리는 결국 상승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이다.

적어도 현재 시장은 그렇게 믿고있는 듯하다.

이 경우 투기세력은 기금을 상대로 적절한 시기에 투기적 공격을 감행할수도
있다.

그리고 기금은 엄청난 자본손실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 손실규모는 기금 전주인 은행이 감당하기 어려운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 다음은 상상의 영역이다.

두번째 문제점은 가정에 근거한 위 시나리오와는 달리 현실적 문제점이다.

기금이 채권시장을 마비시키고 이자율의 가격기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채권시장은 더이상 자금의 수요자와 공급자가 만나는 곳이 아니다.

그 속에는 오로지 한탕 하려는 투기꾼과 정부의 정책의지만 존재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대책은 금융감독당국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추락시켰다.

손실부담을 강요하고 그러다 반발이 나오니까 편법을 동원해 손실을 보전해
주는 현실속에서 어떻게 금융감독당국이 건전성 감독을 할수 있겠는가.

자본잠식 된 금융기관이 그것은 금융감독당국이 떠넘긴 손실 때문이지 자체
부실경영 때문은 아니라고 강변할때 과연 감독당국이 "눈 딱감고" 그 금융
기관을 퇴출시킬수 있겠는가.

모두가 죄인인데 누구에게 돌을 던지랴.

한투와 대투가 말없이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더이상 해결책은 없는가.

그렇지 않다.

필자는 오히려 지금이 해결의 적기라고 본다.

당초의 충격이 사라지고 관련자가 이 문제를 냉정하게 몇번씩은 생각해본
지금, 그리고 실질적인 환매가능일이 개시된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해결의 축은 싯가평가제의 전격실시와 환매보장의 부분적 철회다.

필자가 자세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여기서 언급할 능력은 없다.

그러나 대강의 그림은 다음과 같다.

우선 투신사가 보유한 공사채중 대우채 관련 부분을 제외한 비대우채에
관해서는 예외없는 싯가평가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한다.

그에 따른 손실은 모두 일반투자자의 책임으로 한다.

대우채 관련부분은 그동안의 약속을 부분적으로 존중해 향후 일정기간
이내에 환매할 경우 당초의 80%를 그대로 인정한다.

다만 내년 2월에 약속된 95%는 없던 일로 한다.

이 방법은 투신사 문제해결의 핵심인 손실분담을 원칙대로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부작용은 두가지다.

하나는 부분적인 인출사태이고 다른 하나는 약속을 철회하는데 따르는
부담이다.

부분적인 인출사태는 순수한 유동성의 문제이므로 이것이야말로 채권시장
안정기금이 자랑스럽게 담당할수 있는 문제다.

시장의 충격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며칠동안 환매를 일시금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환매에 대한 약속철회는 정치적 결심의 문제다.

필요하다면 경제팀을 개편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부담을 무릅쓰고 싯가평가제를 결행해야 할까.

물론이다.

금융시장에 규율이 바로 서고 이자율의 가격기능이 살아나며 감독당국도
건전성 감독에만 전념할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정부가 할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씁쓸할 뿐이다.

< sjun@wow.hongik.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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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MIT 경제학박사
<>텍사스대 교수
<>저서:화폐와 신용의 경제학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