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는 농민들의 마음이 크게 아팠던 한 주였다.

세계무역기구가 벌이는 차기협상 시작을 보름정도 앞두고 발표된 각료선언문
탓이었다.

두 차례나 수정되고도 이 문건이 초안과 다름없이 농산물시장 완전개방과
무관세화를 원칙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마침 지난 11일 농업인의 날을 맞은 농민들은 여러 모임을 갖고 한국 농업의
살길을 모색하는 한편 정부측에 대책마련을 호소했다.

그러나 호소하면 할수록 농민들의 마음은 더 착잡해지기만 한 느낌이다.

정부나 언론 그리고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냉담했기
때문이다.

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종료이후 냉가슴을 앓아왔던 농민들이 이제는
그야말로 외톨이 신세가 되버린 상황이다.

농산물 시장의 적극 방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기는 했지만 농업때문에
다른 분야를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소리도 드높았다.

농업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상황을 반영하듯 농업관련 행사장은 대부분
썰렁한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농산물을 수출하는 주요국가들의 공세는 날로 집요해지고 있고 그 강도가
날로 높아가지만 국내에서는 농업에 대한 관심이 이처럼 엷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여건의 변화가 없다면 마지막 남겨진 쌀시장과 쇠고기 냉장육시장의
완전개방도 멀지 않은 것 같다.

현재 정황대로라면 쌀시장은 2004년 또는 2005년부터 수입쿼터제에서
관세제로 바뀔 것이 유력하다.

그리고 차츰 관세율이 낮아져 2010년경 완전경쟁체제로 돌입하게 될 가능성
이 높다.

이 경우 한국은 73년 오일쇼크나 97년 외환쇼크보다 더 강도 높은 식량쇼크
를 맞게될지도 모른다.

2010년 세계인구는 70억명을 넘어서 지금보다 17%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반면 세계 경지면적은 산업화와 인구증가로 매년 한국 전체 경지면적의
2배 규모만큼씩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이를 전제로 하면 2010년의 경지면적은 지금보다 6% 이상 줄어든다.

게다가 단위면적당 곡물수확량은 92년부터 정체상태에 빠져있다.

획기적인 유전자조작을 해내지 않는한 수확량은 현 수준과 비슷할 것이다.

따라서 10년 후 곡물수급은 지금보다 23%가량 부족 상태로 변해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더 나쁠 것이다.

수자원 고갈로 농업용수는 물론 식수도 모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2010년까지 가는 동안 한국 농촌은 많은 변화를 겪을 것이다.

일부에서 추정하듯 한국의 쌀시장이 완전개방돼 농업가구의 절반, 쌀농사
가구의 80%가 폐업하게 된다면 농촌실업자는 70만 가구, 230만여명에 달할
것이다.

농기계 비료 종묘 등 연관산업계에서도 실업자가 양산될 것이다.

전체 논의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준농림지가 생계비 보전의 일환으로
대거 용도변경될 수도 있다.

여의도 면적의 1만5천배에 달하는 논이 매물로 나오면서 땅값이 요동을 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상황만 보고 식량은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국제쌀값이 국산쌀의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10년후엔 아주
온건한 예측으로도 지금의 2배가 돼 있을 것이라는 것이 미국 월드워치 연
구소와 일본 농무성의 전망이다.

만약 여기에 물부족 사태와 환경악화, 유전자조작식품 기피증의 심화,
중국농업의 급격한 하락 등 다양한 변수를 감안하면 지금보다 40~50배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특히 농산물 잉여국은 거의 다 선진국이다.

농산물 수입국은 거의 다 빈국이다.

아쉬울 것이 없는 소수 농업선진국은 식량을 무기화하고자 하는 유혹을
강하게 느낄 것이다.

한국과 각종 공산품시장에서 경쟁하는 나라일수록 더 그럴 것이다.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하지 못하고 농산물시장을 내주며 얻어냈던 공산품
시장에서도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어느 누구도 농산물 시장의 미래와 관련한 정교한
시나리오 한번 그려보지 않은채 농업을 포기해도 좋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곡물자급률은 현재 30%가 채 안 된다.

쌀시장이 개방되면 10년후 5%로 떨어질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들은 대부분 50~60%의 자급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곡물수출을 금지할 수 있는 법을 마련해 놓고 있다.

스위스의 경우는 식량안보를 아예 법제화 해놓고 있다.

훗날 한국인은 관세화가 아니라 수입쿼터를 10배로 늘려주겠다고 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할 지 모른다.

< 전문위원 shindw@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