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태 경제사절단 파견 ]

1840년 아편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즉각 그 진상규명에 나섰다.

이때 우연히 만난 한국 관계자에게 이 사건을 전했다.

한국관계자는 태연히 말했다고 했다.

"그런 일은 대국(청나라를 말함)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와 관계없다"

사실 조선 왕조 5백년, 아니 훨씬 전부터 우리 민족은 해외 정보는
중국이라는 단 하나의 창구를 통해 얻었다.

여러개의 창구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입수, 비교분석하고 전략을 세우는
지능은 완전히 퇴화됐다.

결국 "은둔의 나라"가 됐다.

필자는 우리가 열강에 뒤지고 일본에 국치를 당한 근본이유를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찾기도 했다.

필자는 사무국장이 되자마자 대외협력의 기본전략을 "정보의 창"을 많이
만드는데 뒀다.

경제인협회는 미국 일본 영국 등에 이미 정보 라인을 확보했다.

세계지도를 살피니 동남아 및 태평양지역이 공백이었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됐다.

66년에 접어들어 한국에서 아.태각료회의(ASPAC)가 열렸다.

아.태지역 협력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경제인협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태 경협추진위원회"를 설립했다.

공동의장에 홍재선 경협 회장을 모셨다.

필자는 아.태지역 협력은 아직 계몽단계인 만큼 학생들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최문환 서울대 총장을 공동의장으로 추대했다.

곧이어 이 추진위에서 "아.태 경제권 형성"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
(67년6월21일)했다.

연사는 이한빈(서울 행정대학원장), 길버트 브라운 USOM 경제고문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런 주제의 회의가 처음이었다.

당시 경제인협회는 교육이나 계도의 역할도 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사무국
에도 이를 강조했다.

아.태 경제권 형성에 대한 국내에서의 계도는 됐다고 생각, 사절단파견에
본격 착수한다.

67년 10월22일부터 12월2일까지 장장 40일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사절단 구성 또한 거물급이었다.

단장에 홍재선 경협회장, 부단장에 임문환 부회장(동아제지), 단원으로
김용완 경방사장(경협 전회장), 홍용희(한은 부총재),김수근(문경태좌,
현 대성산업회장) 등 15명이다.

단장인 홍재선 쌍용 사장은 김용완 사장 뒤를 이어 66년4월 투표로 회장에
선출됐다.

이무렵 IFC 투자에 의한 개발금융회사 설립 등으로 경제인협회 명성은
국제적으로 크게 높아졌다.

이런 여건에서 67년10월22일, 아.태 경제사절단은 중화민국(타이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호주 뉴질랜드로 출발했다.

필자의 머리에는 한국과 이지역을 연결시키는 문제로 꽉 차 있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다만 우리세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이지역 경제협력권도 10~20년을 내다보면서 유럽공동시장 같은 체제로
구상해야 할 것이다.

당시를 회상하면 아.태 사절단만큼 본인을 흥분시키고 기대에 부풀게 한
것도 드물었다.

첫번째 목적지는 중화민국 즉 타이베이다.

한국보다 꼭 10년 앞선 1952년,1차 4개년계획을 추진한 나라다.

영토(경상남북도 크기), 인구(2천2백만)는 우리보다 작지만 기후조건과
천연가스 등 부존자원은 꽤 있는 나라.

특히 해외 화교와 맺은 끈끈한 네트워크는 우리를 부럽게 한다.

타이완이 중소기업 중심의 수출주도 성장전략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5백50만이 넘는 해외 화교와의 연결고리 덕분이 크다.

도착한날 현지 석간신문은 앞으로 제4차 4개년계획 추진은 "전자공업 중심"
으로 하겠다는 이국정 기획원장의 성명을 대서특필했다.

한국은 아직 전자공업이라는 용어 자체도 낯설때였다.

타이완경제발전의 대부로 존경받는 이국정 장관은 우리 사절단에게 경제상황
을 설명했다.

1942년, 중일전쟁때 장개석 총통이 전후 중화민국 경제발전 요원으로
활용키위해 영국에 유학 보낸 1기생이다.

이어서 중화민국 공상협진회 구진포 회장과 한중경제협력 구성을 논의했다.

< 전경련 전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