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개발.훈련센터 무산 ]

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경제인협회 대외협력은 가속도가 붙는다.

세계은행의 후원 아래 IFC(국제금융공사) 출자에 의한 개발금융회사 설립이
착착 진행된다.

그러나 일본과는 시찰단, 합동회의 등 접촉은 빈번했으나 구체적 사업은
아직 없었다.

이때 "프로토 타이프(기계기술자훈련) 센터" 구상이 제기됐다.

일본 기계공업의 대부라는 다찌바나 박사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이 센터야말로 경제인협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낙후된 우리 기계공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기능공을 양성하는 효과까지
기대됐다.

우선 다찌바나 박사의 풍부한 노하우를 얻어 낼 기회를 자주 갖기 위해
"한일 이코노미스트 미팅"을 창설했다.

이 미팅의 목적은 한일 경제.기술 발전 전략의 아이디어 교류에 뒀다.

다치바나 박사를 일본측 회장으로 추대키로 했다.

66년 12월 서울에서 개최된 "한일 이코노미스트 미팅"에서 정식으로 프로토
타이프센터 설립을 결의한다.

그리고 일본측은 일본기계공업연합회와 게이단렌이 합동으로 일본 정부지원
을 요청했다.

67년 2월, 한일각료회담에서 센터설립추진에 합의했다.

이에 발맞춰 경제인협회도 정부관계자를 포함, 산업.기술계 인사 24명으로
"센터 추진위원회"를 구성, 68년에 설립키로 했다.

경제인협회가 67년 "제1회 한일각료회담"에 제출한 프로토 타이프센터
설립안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센터의 목적은 기계의 원형 제작으로 하고 현장 기술을 습득시켜
중소기업에 필요한 기능공 훈련을 도모. 복제생산기술훈련 구상은 본인이
64년 타이베이 방문때 타이완의 생산기술센터견학에서 얻은 것이었다.

정부측 지원사항으로 <>대지 약 20만평 확보, 시설 및 운영자금 마련
<>훈련시설비로 일본 협력자금 지원 요청 등이었다.

센터설치에 관련한 문제도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한국에 가장 긴요한 생산기술 부문이 무엇이며, 어떤 프로토 타이프와
복제기술을 선정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경제인협회가 이미 추대해 구성한 기술자문위원들의 의견을
들었다.

이 센터의 구상이 신문에 발표되자 기아를 창립한 김철호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분은 18세때 일본에 건너가 가진 고초를 겪으면서 기계공장 현장에서
기술을 배우신 분이었다.

"김국장 지금 협회가 추진하는 프로토 타이프센터 구상은 한국기계공업
발전에 절실한 것이니 꼭 성사되도록 부탁하오"

일생을 기계공업발전에 투신한 김철호 사장의 격려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할까.

곧 결론이 날 것을 기대했는데 엉뚱한 소리가 들려 왔다.

프로토 타이프센터 구상이 변질되어 고등기술학교가 설립된다는 소문이었다.

60년대 말 일본협력자금 및 상업차관이 대규모로 들어 왔다.

규모가 큰데다 중.대형 프로젝트로서 정부 관료나 기업인들은 매료됐다.

더욱이 중소기업을 위한 밑바닥 기술, 빛도 안나고 긴 세월 인내가 필요한
센터같은 사업은 우선 순위가 뒤로 밀리게 마련이었다.

일본경제계도 한국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기술개발.훈련센터 구상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소위 부메랑 효과를 염려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큰 상사들이 기술학교 경비지원을 제안했다는 말까지 들려 왔다.

이에 필자는 크게 실망했다.

4~5년동안 정열을 갖고 추진한 프로토 타이프센터 구상이 무산되게 됐다.

정부하고 같이하는 사업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82년 대만의 생산기술센터를 다시 방문했다.

우리 부산지구의 운동화 사업이 세계를 지배할 시기였다.

대만도 우리를 바짝 뒤쫓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동화 구두제작기계를 복제
개발, 시운전하고 있었다.

다시 좌절된 프로토 타이프센터 생각이 났다.

이 무렵, 정밀생산장비 수출 선도자인 일본 캐논(Cannon)사와 한국에서 정밀
생산장비 제작을 협의한 일이 있었다.

캐논측 담당자는 "정밀금형 프로토 타이프 제작훈련부터 시작하시오"라고
제안하지 않는가.

또 다시 프로토 타이프센터를 성사시키지 못한 후회가 일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