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 기업의 왕(Bankruptcy King).

미국 언론들은 로스차일드 리커버리 펀드의 윌버 로스 회장을 이렇게
부른다.

그가 지금까지 도산 상태에서 회생시킨 기업들의 자산 가치는 줄잡아
2천여억달러에 달한다.

텍사코 컨티넨털항공 등이 대표적이다.

97년 외환 위기 이후 조흥은행과 한라그룹 등 아시아의 상당수 기업들도
그의 치료를 받았다.

요즘 한국 경제는 대우그룹 처리 11월 대란설 등으로 또다시 극심한 혼미
속에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기업 회생 전문가인 로스 회장은 한국이 꾸준히 구조조정을 단행
하면 제2의 위기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특히 한국경제의 전망은 일본보다 밝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21세기가 한국의
세기가 될수 있다고 까지 말했다.

로스 회장을 뉴욕 맨해튼 6번 애브뉴에 있는 로스차일드사 집무실에서
만났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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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버리 펀드는 월가에서도 전문가가 몇 안되는 독특한 금융 분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분야를 개척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64년 월가의 한 투자금융회사에 입문한 뒤 10년 동안 벤처 캐피털을 담당
했다.

그리고는 74년 로스차일드사에 스카우트돼 자리를 옮겼는데 그때 곧바로
떨어진 일이 경영 위기로 부도 직전에 몰린 페더럴 익스프레스를 되살려내는
작업이었다.

월가 투자가들의 자금을 끌어모아 페더럴 익스프레스에 8백만달러를 긴급
수혈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부도 위기에 몰린 기업들을 회생시키는 프로젝트가 나에게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그 일이 전공처럼 됐다"

-요즘에는 어떤 기업들을 다루고 있는가.

"LG전자가 인수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제니스사를 비롯 미국에도
요즘 부도 위기에 빠진 기업들이 많다.

이들 기업을 회생시키는 작업을 맡고 있다.

헤지펀드인 롱 텀 캐피털을 부도 직전에 건져낸 구제 금융 프로젝트에도
지원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한라그룹 계열사들의 해외 매각 등 구조 조정을 주선하는 일도
내겐 중요한 작업이다"

-한라 계열사들의 구조 조정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몇군데 회사들은 해외 매각이 이미 완료됐다.

한라제지는 미국의 보워터사에 팔렸고 한라시멘트 역시 라파지사가 인수
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만도기계는 프랑스의 발레오사에 매각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남은 관건은 그룹 주력이었던 한라중공업인데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처리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다.

노조의 잇단 파업 사태까지 겹쳐 마땅한 투자자가 선뜻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 이외에도 많은 나라들의 기업 구조 조정에 관여해온 걸로
알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어떤 것들인가.

"90년대초 두차례씩이나 부도위기를 맞았던 컨티넨털항공, TWA 등 미국
항공회사들을 회생시킨 것이 기억에 남는다.

도산한 석유회사 펜조일을 텍사코가 30억달러에 인수토록 주선했던 것도
보람을 느낀 작업이다.

해외의 경우 이탈리아의 방코 데 나폴리(은행)를 처리한 것은 대표적 성과
라고 자부하고 있다.

이탈리아 정부까지 나섰는데도 해결하지 못했던 나폴리 은행의 부도 사태를
몇 단계로 나눠 매듭지었다.

우선 채권기관들과 협의해 10조리라의 악성 부채를 상각하고 이어 은행을
여러 부문으로 쪼개 매각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 주효했다"

-부도 기업 해결사로서 갖고 있는 철학은 무엇인가.

"기업이 망하면 사회 전체가 그에 따른 부담을 지게 된다.

따라서 부도 기업을 회생시키는 것은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자부한다.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는 물론 국가의 자산이랄 수 있는 기업의 가치를
지켜 내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부도 위기에 몰린 기업을 어떻게 재빨리 구조 조정시키느냐가 중요한 관건
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이 국제적으로 금융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탓인지 해외 경제의
구조 조정에 미국식 모델을 지나치게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소위 아메리칸 스탠더드가 곧 글로벌 스탠더드로 통용되는데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미국식 시스템이 다른 나라에 비해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미국은 요즘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추진하고 있는 기업 구조 조정
등을 이미 10년 전에 거치면서 나름대로 노하우를 쌓았다.

구조 조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미국 금융기관들의 눈에 일부 국가들의
기업 구조조정이 미흡하게 비칠 수는 있는 것 아닌가"

-한국 기업들의 구조 조정 작업에 관여하면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

"97년 외환 위기를 맞았던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한국 만큼 상황에 정면
대응한 나라는 없는 것 같다.

특히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인상적이었다.

한라그룹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정부의 협조가 큰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도 한국 정부는 개혁에 대한 비전이 뚜렷했고 그것을 추진하는
자세도 진지했다.

대우그룹 사태에 정면으로 대처하고 있는 최근의 예는 시사하는게 많다.

다만 아쉬운 대목은 대우그룹의 부채 상환 작업이 해외 채권자들에게도
공정한 방향으로 처리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국제적으로 불공정한 관행은 결코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을 당국자들은 유념해 주기 바란다"

-대우 사태로 한국의 금융시장이 또다시 술렁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11월 대란설까지 나돌고 있다.

한국이 제2의 외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은 97년 외환 위기 이후 구조적인 부실 요인들을 과감하게 도려내면서
체질 전환을 성공적으로 진행해 왔다.

대우그룹 정리는 그 과정에서 어차피 겪어야 했던 고통스런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한국 정부가 밝힌대로 대우그룹과 부실 금융기관들에 대한 정리가 올해안에
일단락되고 나면 한국 경제는 해외 투자가들에게 한결 투명한 투자 대상으로
재조명될 것이다.

한국 경제는 외과적 처방이 매듭 단계에 있는 만큼 이제부터는 금융기관들의
운영 방식 등 내적 체질을 개선하는 일을 본격화했으면 좋겠다"

-아시아 국가들이 새겨야 할 교훈은 무엇이라고 보나.

"경제 운영을 순리에 맡겨야 한다는 점이다.

솔직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금융기관의 기업 대출 등이 시장
원리에 따라 결정되지 않은 경우가 많지 않았는가.

기업들은 손쉽게 빌린 돈을 규모확장을 위해 투입했지만 성공적으로 이익을
창출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결과 금융기관까지 부실화되고 말았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시장 원리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실업자에 대한 최소한의 생계 지원이 보장되는 방향
으로 사회적 안전 장치가 구축돼야 한다.

그래야 기업들이 마음놓고 구조 조정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업들의 장점과 단점은 각각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왕성한 근로 의욕과 선공후사 정신 등은 한국 사회 특유의 미덕이다.

높은 저축 성향도 지금까지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을 가능케 한 밑거름의
하나였다.

하지만 외국 문물에 대한 배타적 성향은 시정돼야 할 대표적인 문제점이다.

그런 점에서 외환위기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대외 개방의 이점에 눈뜨게
해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향후의 한국 경제를 어떻게 전망하는가.

"미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일본보다 한국에 훨씬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일본 경제가 요즘 회복되는 듯 하지만 내용을 따져 보면 정부의 재정
투입에 의한 경기 부양조치가 일시적으로 효과를 내고 있는 덕분일 뿐이다.

그 결과 일본 정부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올들어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시간당 4천5백만달러꼴로 차입을 해왔다.

일본 중앙정부가 세계 최대의 채무자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 부담은 정부 뿐 아니라 민간 부문도 함께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평균 2%에도 못미쳤던 일본의 차입금리도 점차
치솟게 될 전망이다.

반면 한국은 대우 사태를 정면으로 해결하는 등 위기 상황을 구조 조정
이라는 정공법으로 헤쳐나가고 있다.

대우 문제만 잘 매듭된다면 한국은 다시 금리가 하락하는 등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이 경우 한 일간 고질적 문제였던 금리차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되고, 한일
경제력 격차도 크게 좁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한국인들이 하기에 따라서는 21세기를 한국의 세기로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의 세계 경제 패러다임은 어떻게 변모될 것으로 보는가.

"동서양의 기존 시스템이 합일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으로 본다.

예컨대 한국 등 아시아 기업들은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중요한 변신의
전기를 맞고 있다.

가족 내지는 온정주의 경제 시스템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면서 보다
합리주의적인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하지만 소위 아시아적 가치에는 장점도 많다.

조직을 위한 개인의 희생정신 등은 서양쪽이 배워야 할 미덕이다.

미국 기업들은 내심 이런 가치의 중요성에 눈을 떠가고 있다.

따라서 21세기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가치가 다른 곳에 그대로 전파되기
보다는 각각의 장점을 소화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될 것으로
본다"

-최고 경영자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지도력이다.

사내외에 뚜렷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구성원들로 하여금 회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목적지에 어떻게 닿을
수 있는지 등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인터넷 혁명이 21세기 지구촌을 어떻게 바꿀 것으로 보는가.

"금융 서비스 제조업 등 모든 산업의 패턴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변모
하겠지만 특히 유통 분야의 변화가 클 것 같다.

금융 분야의 경우도 인터넷 뱅킹과 전자 금융거래, 인터넷을 통한 대출 및
주식 거래가 일반화되는 등 엄청난 변화가 뒤따를 전망이다.

이는 인류 사회의 공통 문제였던 도시화 현상을 해소하는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본다.

사람들이 더 이상 대도시에 몰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각국의 고질인 교통 혼잡 문제도 더불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즐겨 읽는 책들은 무엇인가.

"전기를 좋아한다.

틈이 나면 주로 기업인과 정치인들의 자서전을 탐독한다.

비즈니스란 어차피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 아닌가.

전기나 자서전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