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사회를 그린 SF영화 "토털리콜"의 한 장면.

직장에서 돌아온 샐러리맨이 TV 리모컨을 누른다.

그러자 벽면 전체가 한순간 화면으로 바뀐다.

대형 스크린에는 평온한 전원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이 영화를 유심히 바라보면 한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거대한 벽면을 어떻게 스크린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바로 평판 디스플레이(FPD.Flat Panel Display)에 숨겨져
있다.

평판 디스플레이가 TV와 PC에 처음 채택된 것은 지난 80년대 중반.

이후 불과 10여년만인 97년 3백억달러 규모의 전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평판 디스플레이의 비중이 40%로 급상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디스플레이(영상표시) 장치의 맹주로 자리잡고 있는
브라운관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두껍고 무거운 진공관(음극선관)이 필요한 브라운관을 두께 1cm 미만의
패널로 대신하고 있기 때문.

간편하게 들고 다니는 노트북 PC과 이동통신단말기는 평판 디스플레이
덕분에 탄생했다.

21세기에 일반화될 디지털 고선명 TV나 벽걸이형 TV에도 평판 디스플레이
기술이 모태가 되고 있다.

평판 디스플레이는 크게 초박막 액정표시장치(TFT-LCD)와 자기발광표시소자
(PDP) 유기전자형광발광소자(유기ELD) FED(전계발광소자) 등 네가지로
나뉜다.

TFT-LCD는 박막트랜지스터에서 처리된 전기신호를 LCD를 통해 문자 영상
등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생산공정 등 여러 면에서 반도체와 비슷하지만 수십만개의 소자 가운데
하나만 잘못돼도 패널 자체를 버리는 초정밀 제품이다.

PDP는 수백미크론m(1미크론m는 1백만분의 1m) 이하의 간격으로 접합한
두장의 기판 사이에서 형광체를 발광시켜 영상을 표시하는 장치.

TFT-LCD에 비해 두께와 시야각이 좋고 40인치 이상 대형 TV와 모니터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기엔 고가이므로 당분간 공공전시나 교육 회의용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87년 미국 코닥사가 개발한 유기ELD는 자체 발광방식으로 백라이트가 필요
없다.

형광등의 1백배 밝기인 제곱m당 10만 칸델라의 고휘도를 발휘, TFT-LCD와
시장경쟁이 예상된다.

FED도 자체 발광형으로 TFT-LCD에 비해 모든 성능이 앞서지만 대형화가
어려워 이동통신단말기에 주로 사용될 전망이다.

하지만 유기 ELD와 FED는 가격이 비싸 아직까지 본격적인 상용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선두주자는 TFT-LCD.

PC모니터 액정TV 의료기기 광고패널 등에 다양하게 활용되는 TFT-LCD는
매년 20~30%의 고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세계 시장 규모도 올해 1백10억달러에서 오는 2005년 3백40억달러로
급신장, D램 시장을 추월할 전망이다.

한국은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생산력을 갖추고 있다.

삼성과 LG가 96년 첫 양산을 시작한지 4년만에 세계 시장의 19%와 15%를
점유, 일본의 벽을 넘어섰다.

공급과잉으로 일본 업체들이 주춤하는 사이 13.3인치 대형 제품개발에
집중 투자한 것이 주효한 덕분이다.

TFT-LCD는 수출에서도 효자품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올들어 지난 7월까지 15억달러가 넘는 수출실적을 나타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백70%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20인치급 의료기기용 제품은 개당 6천달러에 달하는 고부가가치 상품
으로 소형차 한대와 맞먹는 가격이다.

이에 따라 국내 업체들은 올들어 생산설비 확대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5천억원을 투자, 2000년말 월 3만개 생산능력을 가진 4세대
라인을 완성할 계획이다.

네덜란드 필립스사로부터 16억달러를 유치한 LG필립스LCD도 9천억원 규모의
3공장을 설립해 2000년 하반기부터 가동에 들어간다.

세계 시장 점유율 10위인 현대전자도 2천억~3천억원을 투자, 내년부터
3.5세대 라인을 돌릴 예정이다.

평판 디스플레이의 잠재력은 관련산업에 대한 파급효과가 광범위한데서
찾을 수 있다.

노트북PC 이동통신단말기 가전 등 응용기기분야의 전방산업과 반도체 소재
장비 등 생산기술을 뒷받침하는 후방산업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동반상승
효과를 일으킨다.

일본 업체들이 재료로부터 시스템에 이르는 전.후방 연관효과를 극대화,
디스플레이 시장을 선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은 TFT-LCD의 성공을 발판으로 평판 디스플레이의 선진국으로 부상
했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평판 디스플레이 시장에 점차 PDP 유기EL FED 등 신기술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경쟁업체들은 신기술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략해 세계 1위 자리를
재탈환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더욱이 대만의 브라운관 및 반도체 업체들도 일본 기술을 도입,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하고 있다.

중화영관 등 5개 업체는 당초 계획보다 2배가 넘는 생산설비를 갖출 예정
이다.

2001년 중반에는 대만의 TFT-LCD 생산능력이 연간 3백80만장에 육박하게
된다.

또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고급인력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고정민 수석연구원은 "일본이 한순간의 방심으로 TFT-LCD
패권을 내준 것처럼 한국도 언제 주도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며 "지속적인
신기술 개발과 과감한 투자만이 세계 최고 자리를 수성하는 길"이라고 지적
했다.

< 정한영 기자 chy@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