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는 대와 나무가 책의 재료로 쓰였다.

비단도 활용됐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점토판에 갈대로 설형문자를 기록했다.

고대 유적 발굴에 의하면 아슈르바니팔왕의 도서관에는 2만부에 달하는
점토판 서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무겁고 운반하기 불편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책의 재료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파피루스"라는 식물이다.

이는 기원전부터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 유용한 정보전달 체계로 쓰였다.

로마 학자 플리니우스(23~79)의 "박물지"에는 이 식물로 책을 만드는
방법이 기록돼 있다.

종이를 뜻하는 영어의 "페이퍼"나 독일어 "파피르", 프랑스어 "파피에",
러시아어 "파푸카"의 어원도 파피루스다.

파피루스본의 출현으로 인해 서적문화는 급속도로 발달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70만권의 파피루스본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었다.

라틴문학의 수액은 파피루스라는 줄기를 타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다.

중국 후한의 화제시대(88~105)에 종이가 발명되자 책의 역사는 혁명적인
변화를 맞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285년 백제가 천자문을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2~3세기쯤에 제지법이 알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지기술은 751년 당나라가 아바스족에게 패배한 뒤 포로로 끌려간 제지공들
에 의해 사마르칸트와 바그다드로 전해졌다.

13세기에는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 에스파냐에 상륙했다.

활자인쇄술은 중세의 문화보급을 활성화시킨 일등 공신이었다.

활판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1397~1468)는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
성서"를 펴냈다.

종이와 인쇄술의 발달은 학문과 고급정보의 확산을 가져 왔고 철학이나
실용정보의 공유도 가능해졌다.

2차대전 후에 서적계에 일어난 최대의 변화는 페이퍼백의 출현이다.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고 값도 싸졌다.

이제 책은 단행본이라는 형태를 벗어나 전자서적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책의 운명은 앞으로 얼마나 더 바뀔지 단언할 수 없다.

책은 형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미학적 재질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인류 최대의 문화유산이라는 책의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