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집집마다 광섬유케이블이 깔렸다.

전 국민의 문화네트워크가 완성됐고 누구나 전자도서관을 갖게 됐다.

소설가 구보씨는 그때 휴대용 정보단말기도 구입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이니까 그도 제법 "깨인 사람"축에 들었다.

그때는 액정표시기가 좀 큰 편이었지만 지금은 손바닥만하게 줄었다.

그는 이 단말기를 "걸어다니는 서점"이라고 불렀다.

저녁 산책 때는 늘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날이 저물어도 전원만 켜면 독서를 할 수 있어 편리했다.

<> 구텐베르크의 종언

방대한 양의 디지털 정보가 담긴 전자책(e-book).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책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면 21세기의 디지털
기술은 정보문화의 혁명을 이뤄 냈다.

구보씨가 자랄 때만 해도 종이책이 지식전달의 통로였다.

그러나 이제는 종이와 인쇄기계가 필요없다.

여러 권의 책을 들고 다닐 일도 없다.

휴대용 단말기에 수십~수백권의 책을 저장해 언제 어디서든지 골라 볼 수
있다.

구보씨의 딸이 초등학교 6년동안 배울 교과서 내용이 단말기 하나에 다
들어 있다.

20세기말 실리콘밸리의 누보미디어사가 소설책 10권 분량을 담은 "로켓
E북"을 선보인데 이어 발전을 거듭한 결과다.

읽는 도중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전자책에 내장된 사전으로 검색할 수도
있다.

간단한 메모와 프린트기능까지 달렸다.

<> 책 읽어주는 로봇

20년 전에는 전자책값이 텍스트의 다운로드 시간에 따라 결정됐다.

책 한권 분량을 받는데 보통 2~5분이 걸렸다.

가격은 18~25달러.

하지만 이제는 "딸깍"하는 순간에 끝난다.

값도 훨씬 싸졌다.

동영상과 컴퓨터그래픽까지 서비스된다.

눈이 침침하거나 피곤할 때는 말하는 로봇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해도 된다.

인체신경과 닮은 뉴런칩이 들어있어 목소리의 높낮이와 감정표현이 사람과
흡사하다.

작가들은 키보드나 음성인식 장치로 문학작품을 전송한다.

구보씨도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이 없어졌다.

여러가지 데이터를 가공한 다음 재창작하는 장르가 활기를 띠고 독자와
작가가 대화하듯 집필하는 공동창작도 등장했다.

누구나 창작하고 독자가 되는 매스컬처 시대다.

과거 출판사와 도매상 서점을 거쳐 독자에게 전달되던 서적 유통경로는
전설속으로 사라졌다.

고질적이던 재고와 반품도 없어졌다.

출판산업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바귀었다.

<> 신비로운 북토피아

집에 있는 사설 전자도서관은 정말 유용하다.

컴퓨터를 켜고 전자도서관을 불러내면 예쁜 여성 사서가 나타난다.

구보씨는 마우스로 조작하는 것보다 음성인식장치를 더 자주 이용한다.

마이크에 대고 "예술"이라고 말하면 그녀가 예술장르의 서가로 안내해 준다.

단순한 검색기능으로도 찾을 수 있지만 젊은 시절의 도서관에 대한 추억
때문에 그는 이 프로그램을 즐긴다.

컴퓨터그래픽의 도움으로 실제 도서관 안을 걸어다니는 듯한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가상 서가에 꽂힌 책을 클릭하면 곧바로 내용이 뜬다.

바스락대는 음향효과가 들어 있어 책장을 넘기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글씨가 작아 안보일 때는 돋보기 기능을 누른다.

관심있는 분야를 미리 설정해두면 사서가 알아서 정보를 모아주기도 한다.

<> 그래도 남는 종이의 성찰

돌이켜보면 참으로 놀라운 변화다.

구보씨는 자신의 삶을 광속으로 변화시킨 디지털의 위력을 새삼 절감했다.

그런데 이 모든 변화들이 아무런 성찰이나 여과 과정 없이 반복되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구보씨는 산책길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제 받은 편지를 떠올렸다.

디지털 시대에 보기 드문 "종이 편지"였다.

중앙아사아로 유물발굴을 다녀온 그 친구는 "가끔 아날로그 세상이 그립다"
며 "베두인족이 사는 사막으로 여행하거나 유려한 필체의 손글씨를 보면
마음이 포근해진다"고 썼다.

그날 밤 구보씨는 책상 서랍을 뒤져 낡은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는 펄프 용지의 체향을 맡으며 오래 답장을 썼다.

"세상이 빛의 속도로 변하는데 그 뒷면의 그림자를 재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겠나. 오늘부터는 옛땅에 씨앗을 뿌리듯 펜으로 일기를 써볼 참이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