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새 천년기까지 꼭 1백일이 남았다.

한 천년기가 끝나고 새 천년기가 시작된다는 일은 생각하기에 따라선 무척
중요하고 상징적인 일이지만 둘러보면 사람들은 꽤 차분하게 그 일을 맞고
있다.

더러 들려오는 종말론에 빠진 사람들의 얘기들은 지금 세계가 이 문제에
관해 얼마나 차분하게 대응하는지 오히려 잘 드러내준다.

999년의 서양에서 이 세상의 끝이 다가왔다고 믿은 사람들의 광기 어린
행동들과는 퍽이나 대조적이다.

지금 사람들의 눈길은 새 천년기의 문턱 위에 걸린 "Y2K문제"라는 아주
실질적인 과제에 끌리고 있다.

그리고 2000년이 가까워질수록 그 구름장은 점점 커지고 검어진다.

어쩌면 그런 실질적 문제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는 사정이 종말론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아주었는지도 모른다.

"Y2K문제"가 불러올 재앙이 어떤 모습을 할지 그리고 얼마나 클지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이제까지는 그와 같거나 비슷한 성격을 지닌 문제가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큰 재앙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현대사회는 아주 촘촘하게 짜여진 조직이라 한 부분에 일어난 문제는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흔히 "나비효과"라 불리는 "초기조건에 대한 예민한 반응(sensitive
dependence on initial conditions)"으로 사회의 한 분야에서 일어난 마비가
사회 전체로 빠르게 확산되는 모습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전력공급에서의 차질은 특히 큰 문제를 낳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큰 문제에 대한 준비는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

처음 맞는 문제라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다는 사정을 고려
하더라도 준비에 대해 열성적인 기관들은 드물다.

정부와 산하기관들은 준비가 잘 돼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우리 사회의 준비 상황에 관한 외국의 평가도 낮다.

심지어 "Y2K문제"를 해결했다는 인증서를 사고 파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따라서 이 문제로 우리 사회에 상당한 혼란과 마비가 일어나고 시민들이
상당한 불편과 괴로움을 겪을 가능성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엔 긍정적 측면도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좀 가볍게 한다.

"Y2K문제"는 성격에서 몸살과 비슷하다.

몸살은 우리 몸이 혹사당했으며 몸이 쉬도록 해서 큰 병에 걸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Y2K문제"는 우리 사회의 조직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고 그런 복잡하고 유기적인 조직을 점검하고 정비해 정말로 큰
재앙이 닥치는 것을 막을 기회를 준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Y2K문제"와 같은 기술적 문제들이 현대
문명 사회를 낳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현대의 기술 문명은 단 한 세기 전의 사람들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풍요와
안락을 우리가 누리도록 만들었다.

그런 풍요와 안락에 비기면 기술문명이 부딪치는 문제들은 결코 크지도
값이 비싸지도 않다.

기술문명의 대안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목가적 삶이 아니라 적대적 자연
환경에서 생존하는데 힘을 쏟아야 하는 야만인의 고되고 짧은 삶이다.

기술이 불러온 문제들은 더 나은 기술만이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Y2K문제"가 결코 가볍게 여길 문제는 아니지만 그것이 문명의
근본을 흔드는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외환 부족으로 시작된 큰 경제적 위기를 경제학 지식을 활용해
그럭저럭 넘겼듯이 우리는 "Y2K문제"도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써서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Y2K문제"라는 검은 구름장이 걷히면 우리는 비로소 새 천년기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한 세기 앞을 내다보기도 어려운데 한 천년기 앞을 내다보다니.

10세기 사람이 20세기의 세상을 예측하는 모습을 그려보아야 우리는 그런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가늠할 수 있다.

10세기는 점성술과 천동설이 사회의 정설이었고 말과 돛배가 가장 빠른
교통 수단이었다.

그런 시절을 산 사람들에게 천년 뒤의 세상을 그려보라면 무슨 대답이
나왔을까.

모든 변화들이 가속되고 있으므로 20세기 사람들이 30세기의 세상을
예측하는 일은 실은 10세기 사람들이 20세기의 세상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기원전 10세기 사람들이 20세기의 세상을 예측하는 것에 오히려 가까울
것이다.

곧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안목으로 전자시대 사람들의 삶을 예측하는 것인
셈이다.

자연히 우리는 새 천년기를 살피고 예측하는 일에서 겸허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먼 미래를 예측할 능력이 없다.

분명한 것은 그런 예측에선 과학과 기술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과학과 기술의 참뜻을 알고 그것들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기술 문명이 불러오는 문제들을 그럭저럭 해결해 가면서
문명을 발전시킬 것이다.

그렇게 겸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낙관적인 전망을 지니는 것만이 새로운
천년기를 맞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자세일 터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