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지구촌 신흥갑부] (3) '케빈 오크너 더블클릭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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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오크너는 내게 ''명예의 전당''과도 같은 인물이다"
미국의 저명한 인터넷분석가 다나 블랑켄호른의 찬사다.
그는 인터넷 광고 솔루션업체인 "더블클릭"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오크너(38) 회장을 서슴없이 온라인 광고분야의 1인자로 꼽는다.
아무도 생각치 못했던 분야에서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인터넷 광고시장에
새 장을 열었다는게 그 이유다.
인터넷 잡지인 "e마케터"도 오크너가 하이테크 소프트웨어와 온라인 광고
마케팅 분야에서 "이정표"를 세웠다고 극찬했다.
광고전문잡지인 "어드버타이징 에이지"는 그를 "디지털 미디어의 대가"라고
추켜 세웠다.
심지어 미국 USA투데이는 웹광고 시장에 오크너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시장을 감히 넘보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다.
오크너는 어렸을 적부터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
어린시절을 보냈던 디트로이트의 공장지대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틈만나면 공장주변의 공터를 뒤지고 다녔다.
부모님 몰래 한밤중에 집을 빠져 나간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는 10세때의 어느 여름밤 공터 주변에 버려진 잡동사니 속에서 낡은 TV와
라디오를 발견해 냈다.
이 사건은 어린 오크너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는 그 순간 토마스 에디슨처럼 훌륭한 발명품을 만들어 내겠다고 마음속
으로 다짐했다.
대학시절(미시간대 전자공학과) 오크너는 자신의 꿈을 이뤄줄 대상이 컴퓨터
라는 것을 직감했다.
대학시절 내내 컴퓨터와 씨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지독한 컴퓨터 광"으로 통했다.
오크너는 83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애틀랜타로 달려가 PC통신네트워크회사
(ICC)를 차렸다.
한창 PC붐이 일었던 당시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할 것을 일찌감치 예감,
PC를 각종 네트워크에 접속해주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매달렸다.
그러나 21세의 신출내기 사업가를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족과 친구에게 손을 벌렸고 돼지저금통까지
헐었다.
결국 오크너는 ICC를 창업 9년만에 연간 3천5백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키워냈고 92년 2천5백만달러를 받고 매각했다.
인터넷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95년 오크너는 인터넷 광고시장에서 "돈
냄새"를 맡았다.
그는 즉시 마이애미 대학을 졸업한 28세의 컴퓨터시스템 전문가 드와이트
메리맨을 설득, 인터넷 광고 네트워크관련 소프트웨어사업에 뛰어들었다.
"광고를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광고계의 오랜 숙제를 인터넷
으로 풀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결국 두사람은 1년간의 피나는 노력끝에 광고계의 오랜 난제를 풀어줄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96년1월23일 드디어 "더블클릭"의 닻을 올렸다.
더블클릭은 출발부터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더블클릭이 관리하는 광고배너의 접속횟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창업 1년만에 아메리칸 온라인(AOL)과 야후(Yahoo)의 접속횟수를 바짝
따라잡을 정도로 급신장했다.
더불어 인터넷 광고마케팅 분야에서는 독보적 존재로 부각됐다.
더블클릭은 창업 4년만에 연매출 8천만달러의 기업으로 성장했고 덕분에
창업자 오크너는 4억5천만달러의 인터넷 갑부로 떠올랐다.
ISS그룹의 토마스 누난 회장은 "오크너에겐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 있었고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고 회고했다.
"에디슨의 꿈"을 향한 그의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노력이 오늘날의 성공을
일궈낸 비결이었던 것이다.
< 박영태 기자 py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5일자 ).
미국의 저명한 인터넷분석가 다나 블랑켄호른의 찬사다.
그는 인터넷 광고 솔루션업체인 "더블클릭"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오크너(38) 회장을 서슴없이 온라인 광고분야의 1인자로 꼽는다.
아무도 생각치 못했던 분야에서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인터넷 광고시장에
새 장을 열었다는게 그 이유다.
인터넷 잡지인 "e마케터"도 오크너가 하이테크 소프트웨어와 온라인 광고
마케팅 분야에서 "이정표"를 세웠다고 극찬했다.
광고전문잡지인 "어드버타이징 에이지"는 그를 "디지털 미디어의 대가"라고
추켜 세웠다.
심지어 미국 USA투데이는 웹광고 시장에 오크너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시장을 감히 넘보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다.
오크너는 어렸을 적부터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
어린시절을 보냈던 디트로이트의 공장지대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틈만나면 공장주변의 공터를 뒤지고 다녔다.
부모님 몰래 한밤중에 집을 빠져 나간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는 10세때의 어느 여름밤 공터 주변에 버려진 잡동사니 속에서 낡은 TV와
라디오를 발견해 냈다.
이 사건은 어린 오크너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는 그 순간 토마스 에디슨처럼 훌륭한 발명품을 만들어 내겠다고 마음속
으로 다짐했다.
대학시절(미시간대 전자공학과) 오크너는 자신의 꿈을 이뤄줄 대상이 컴퓨터
라는 것을 직감했다.
대학시절 내내 컴퓨터와 씨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지독한 컴퓨터 광"으로 통했다.
오크너는 83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애틀랜타로 달려가 PC통신네트워크회사
(ICC)를 차렸다.
한창 PC붐이 일었던 당시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할 것을 일찌감치 예감,
PC를 각종 네트워크에 접속해주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매달렸다.
그러나 21세의 신출내기 사업가를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족과 친구에게 손을 벌렸고 돼지저금통까지
헐었다.
결국 오크너는 ICC를 창업 9년만에 연간 3천5백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키워냈고 92년 2천5백만달러를 받고 매각했다.
인터넷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95년 오크너는 인터넷 광고시장에서 "돈
냄새"를 맡았다.
그는 즉시 마이애미 대학을 졸업한 28세의 컴퓨터시스템 전문가 드와이트
메리맨을 설득, 인터넷 광고 네트워크관련 소프트웨어사업에 뛰어들었다.
"광고를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광고계의 오랜 숙제를 인터넷
으로 풀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결국 두사람은 1년간의 피나는 노력끝에 광고계의 오랜 난제를 풀어줄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96년1월23일 드디어 "더블클릭"의 닻을 올렸다.
더블클릭은 출발부터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더블클릭이 관리하는 광고배너의 접속횟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창업 1년만에 아메리칸 온라인(AOL)과 야후(Yahoo)의 접속횟수를 바짝
따라잡을 정도로 급신장했다.
더불어 인터넷 광고마케팅 분야에서는 독보적 존재로 부각됐다.
더블클릭은 창업 4년만에 연매출 8천만달러의 기업으로 성장했고 덕분에
창업자 오크너는 4억5천만달러의 인터넷 갑부로 떠올랐다.
ISS그룹의 토마스 누난 회장은 "오크너에겐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 있었고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고 회고했다.
"에디슨의 꿈"을 향한 그의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노력이 오늘날의 성공을
일궈낸 비결이었던 것이다.
< 박영태 기자 py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