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성 < 서울대 교수 / 국제지역원장 >

20세기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을 들라면 대부분 카를
마르크스와 앨빈 토플러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역사적 시각을 가지고 인류의 과거사를 정리하고 미래를
예측했다.

마르크스는 인류가 원시 공산사회에서 고대 노예사회, 중세 봉건사회를
거쳐 자본주의 사회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기업의 이기적인 태도를 비롯해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생산양식
의 문제점으로 인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산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게
됨에 따라 결국 인류는 자본주의를 버리고 원시 공산사회와 비슷한 공산주의
사회로 회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토플러는 인류가 원초적인 노동력에 입각한 유목사회, 토지를 기초로
한 농경사회를 거쳐 자본을 중심축으로 하는 산업사회로 변화해왔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원의 고갈과 자연의 파괴라는 문제점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산업
사회는 정보를 생산력의 원천으로 하는 정보사회로 변화하리라고 예측했다.

두 사람 모두 지난 2백여년을 자본주의에 입각한 산업사회로 보는 데에는
같은 해석을 했지만 앞으로 나타날 미래에 대해서는 다르게 봤다.

공산사회는 정부가 국가경제를 계획하는 독점체제이지만 정보사회는 정보력
을 가진 기업이 시장경제를 주도하는 경쟁체제로서 이 두체제는 동시에 양립
할 수가 없다.

김대중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발표한 재벌정책을 놓고 언론과
학계, 그리고 재계는 정부의 진의가 재벌 해체인지, 아니면 경쟁력 강화인
지를 놓고 지난 한달동안 활발하게 논의를 진행해왔다.

워낙 재벌문제가 한국경제에 큰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정책은 재벌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이에 대한 정답을 찾으려면 먼저 마르크스와 토플러가 주장하는 미래에서
각각 재벌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인지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논리에 의하면 재벌은 해체될 수밖에 없다.

재벌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경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정부 계획과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재벌이 불필요할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공산화를
방해하는 존재인 것이다.

토플러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재벌이 해체되는 것은 피할 길이 없다.

자본력에 기초를 둔 기업, 특히 대기업은 산업사회에서 주체적 역할을
담당하지만 자본력 대신 정보력이 기초가 되는 정보사회가 도래하면 정보력을
가진 주체에게 그 역할을 내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경제가 마르크스의 주장을 받아들이건, 토플러의 주장을
받아들이건 관계없이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재벌은 해체될 것이다.

다만 누구 주장을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재벌을 대체할 세력이 누구인가가
달라질 따름이다.

마르크스의 미래에서는 재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정부로 대체된다.

반면 토플러의 미래에서는 재벌이 정보력을 가진 탄력적인 소규모 기업,
창업기업에 대체될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인류사를 반추해볼 때 우리는 인간사회가 마르크스를 버리고
토플러를 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공산주의 사회가 환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 반면
정보사회는 이미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온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재벌을 대체할 주체는 공산주의 정부가 아니라 중소기업
창업기업인 것이다.

김 대통령은 재벌체제가 더 이상 현재 모습대로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여러차례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재벌의 대안으로 자본주의를 부인하는 공산사회를
주창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한국이 선진화하려면 정보사회로 가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정보력과
탄력적인 조직을 갖춘 중소기업 창업기업들이 한국경제를 대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길이야 말로 한국경제가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는 점이라는 데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재벌그룹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이 채택할 대안은 세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아직 한국경제가 선진화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때가 올 때까지는 옛날과 같은 재벌체제가 당분간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재벌도 변해야 한다는데 동의하지만 재벌을 포함한 어떤 조직도
환경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변화에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능동적으로 변화에 앞장서는 것이다.

위의 세가지 대안 중에서 재벌 각자에게 가장 바람직한 길이 무엇인가는
분명하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재벌이 한국
경제의 주역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이라고 믿는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