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연극의 창시자 이오네스코(1912~1994)는 "전위가 후위로 돌아갈
때에야 그것이 전위였다는 걸 알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새로운 예술이 처음부터 인정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과론적인 구성이나 사실묘사를 무시한 로브그리예나 사로트의 누보로망,
불협화음으로 가득찬 존 케이지의 전위음악, 클래식발레에 반기를 들고
맨발로 무대에 선 이사도라 던컨의 현대무용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추상화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그러나 "예술의 정신성에
대하여"라는 저서를 통해 이런 거부감과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전위예술을
개척해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한시대의 예술정신을 삼각형으로 볼때 밑변엔 대중, 정점엔 고독한 예술가
가 있다.

이 삼각형은 위로 움직이는 까닭에 오늘 외로운 예술가의 예감이 내일은
지식인의 관심사가 되고 모레는 대중의 취미를 지배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문화관광부가 내년을 "새로운 예술의 해"로 발표한 것은 이채롭다.

오늘날 무엇이 예술이고 아닌지의 구분은 희미하다.

순수와 대중예술은 물론 주류와 비주류 혹은 중심과 변두리문화의 한계도
애매하다.

크로스오버와 퓨전이 모든 예술의 일반적 현상이다.

괴테에 따르면 예술이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에 대한
책임, 낯설고 이질적인 것에 대한 긍정심, 존재에 대한 감사함, 미래의것
에 대한 비판적 개방성을 지니도록 할 때 가치있는 것이다.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고 나타내려는 것이 오늘 이땅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혹은 덜 삭막하게 만들수 있을지가 문제다.

내년을 새로운 예술의 해로 정한 건 오늘날 이땅의 온갖 전위및 비주류
예술을 모아 잔치를 벌임으로써 21세기 한국의 문화를 주도할 새로운
예술형태를 도출하려는 시도인듯 보인다.

하지만 한가지 부문으로 정했던 해에도 집행부 불화등으로 이렇다할 행사
한번 못치른채 지난적이 많았음을 돌이켜볼때 개념조차 불분명한 "새로운
예술의 해"가 과연 어떤 형태로 진행되고 얼마만한 결실을 거둘수 있을지
궁금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