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 미국 MIT 교수 >

폴 케네디가 지난 89년 쓴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은 제국주의의 과도한 확장을 주제로 다뤘다.

그에 따르면 유일한 슈퍼파워인 미국은 경찰국가에 주어지는 군사적 책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마침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92년 레스터 서로 MIT 교수가 저술한 "세계경제전쟁"(Head to Head)에서도
미국의 장래는 암울했다.

선진 산업국가들간의 사력을 다한 경제전쟁을 그린 이 책에서 미국은 자유
시장에 대한 순진무구한 믿음을 버리지 못해 경쟁에서 뒤처진다.

그러나 가장 근래에 나온 토머스 프리드먼의 "올리브나무와 렉서스"(The
Lexus and the Olive Tree)에서는 미국의 이미지가 바뀐다.

새로운 글로벌경제체제를 다룬 이 책에서 미국은 겨우 승리하는 국가가
된다.

그 이유는 글로벌경제체제에 가장 적합한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먼의 주장은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자주 소개돼왔다.

요지는 이렇다.

정보통신기술이 세상을 좁은 공간으로 만들었다.

아이디어와 자본은 그속에서 무한에 가까운 속도와 빈도로 국경을 넘나든다.

갈수록 좁아지는 세상은 이제 그 요구에 부응하는 국가와 사회에는 보다
많은 보상을 하지만 이에 반하는 경우에는 파멸에 가까운 형벌을 가한다.

세상의 요구는 바로 글로벌스탠더드(세계표준)다.

보다 강력하게 보호되는 사유재산권, 자유시장으로 연결되는 열린 마음,
규제완화로 이어지는 유연한 태도등이 글로벌스탠더드다.

프리드먼은 많은 일화를 예로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아주 가깝게 느껴지는 개인의 일상생활 이야기를 통해 주장을 관철하는
것은 분석적인 추론이 주는 것 이상의 신뢰감을 준다.

그러나 어느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뢰감을 주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프리드먼은 그의 저서에서 최소한 한가지 큰 잘못을 범했다.

그는 미국을 승리한 나라의 이미지로 부각시켰다.

또 이 책보다 먼저 나온 책들(강대국의 흥망, 세계경제전쟁)에 등장하는
세상이 바보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프리드먼이 옳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최근 대조되고 있는 경제동향 때문
이다.

미국경제가 기대하지 않았던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경제가
예상치 못했던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좋은 대조다.

그러나 그는 저서를 집필하면서 일본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해
주의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일본인들은 "전통지향적"이고 "비효율적"인 특성 때문에, 글로벌경제
체제에 자신들을 적응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프리드먼 스스로가 지적하는 것처럼 일본의 수출부문은 여전히
세계적인 수준이다.

렉서스(도요타자동차의 모델명)는 일본 제조업의 위풍당당함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침체속에서 묶어두는 것은 내수시장을 향한
생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의 내수시장을 향한 생산은 그다지 효율적이진 않다.

더구나 지금 당장의 문제는 불충분한 공급이 아니라 적절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수요에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본인들은 지나치게 많은 저축을 한다.

일본은 지난 30년대이래 가장 전형적인 케인스식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미국경제가 잘 나간다고 하지만 글로벌시장에서 눈에 두드러지게 성공한
것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저 엔터테인먼트부문이 두드러질 뿐이다.

오히려 미국제조업체들은 수출시장에서 맥을 못추고 있다는 평가가 옳다.

이때문에 새로운 밀레니엄은 사상 최대의 무역적자와 함께 찾아올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다.

미국을 유례없는 대호황속으로 이끈 것은 소비지출의 놀랄만한 증가였다.

위에서 언급한 3권의 책에 나타난 미국과 일본의 입장변화는 글로벌화의
새로운 논리에 의해서라기보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거시경제학적
불일치와 연관이 있다.

프리드먼이 생각하는 것만큼 게임의 법칙이 변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난 79년 사람들은 맬서스적인 세상을 얘기했다.

오일쇼크를 계기로 본격화된 에너지 위기가 희소자원에 대한 경쟁을 예고
했다.

10년 후인 89년에는 사람들이 제조업을 둘러싼 경쟁을 주시했다.

승리자는 정부의 산업정책이 확고한 나라들이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지식경제시대가 됐다고 얘기한다.

상호간 장벽을 무너뜨리고 사이버공간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나아가야 경쟁
에서 이길수 있다고 주장한다.

10년후인 오는 2009년에는 사람들이 또 어떤 얘기를 하게 될지 자못 궁금
하다.

< 정리=박재림 기자 tr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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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MIT 경제학 교수인 폴 크루그먼 박사가 그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정리한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