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빈 < 외국문학연 초빙연구원 >

1980년대 독일 역사학계를 뒤흔든 "역사학자들의 논쟁"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놀테, 힐그루버를 비롯한 독일 우파 역사학자들은 소련 수용소가 이미
존재했기에 필연적으로 그 역사적 대응물로서 나치 수용소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한다.

반면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한 독일 좌파 역사학자들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없애려는 시도는 독일 고유의 특성에서 기인했으므로 독일이
존재하는 한 유태인 학살에 대해 영원히 책임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 두 주장 사이의 접합점이 생겨날 것 같지는 않다.

20세기가 전체주의의 시대였고, 이 시대의 가공스러운 두 개의 부산물은
소련 수용소와 나치 수용소였다.

이 사실에 서구학자들의 대부분은 동감하고 있다.

20세기를 정리하는 입장에서 우리 시대의 파시즘 문제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문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2차대전 종전
후부터 현재까지 줄기차게 서구 문학을 지배하고 있는 화두 중의 하나이다.

왜 아직도 2차대전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일까.

50여년이 지난 지금 유럽 각국은 유태인 학살에 대한 죄의식을 떨쳐버리고
아픈 과거를 역사화하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즉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증언의 시기"에서 "기억의 시기" "애도의 시기"를
거쳐 "역사의 시기"에 도달했고, 도덕적 차원에서는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기억의 의무"가 강조되던 시기가 지난 후 오늘날 오히려 "망각의 의무"가
요구되고 있다.

또 경험적 차원에서는 폭력의 인정에 기초해 대화를 통한 화해가 모색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유태인 학살의 비교불가능성에 대한 모든 토론을
종식시키고 유태 중심적이고도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고정시각을 거부할수
있을까.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사건은 어떤 방식으로 얘기될수 있을까.

시간의 흐름은 체험의 단순한 기록을 뛰어넘어 이 비극적 사건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문학과 예술이 20세기 이전에 대학살이라는 소재를 다뤄본 적이 없었던
까닭에 아우슈비츠는 인간, 그리고 역사의 재현에 있어 유례없는 단절을
야기시킨다.

그 논쟁들이 역사 해석의 차원에서 정념이 가미된 형태를 띠든, 아니면
문학 쪽에서 허구와 진실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전통적 형태의 지각
변동을 야기시키든 간에 유태인 학살의 문제는 과거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그 이해를 바탕으로 한 현대예술 전반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가스실을 이용한 타인종의 절멸"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다각도의 접근이 모색되고 있는 현상은 바람직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자신
들의 역사를 보편화시키려는 유태인들의 지독한 노력이 숨어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개별적인 역사의 인정에 인색한 우리의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이 "기억하라!"는 주장에 귀기울이는 반면,
한쪽에서는 패배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당당한, 끊임없이 가벼움으로
충만한 세대가 존재한다.

우리 사회가 자신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을까.

현기증나는 변화와 물질적 풍요로움은 우리 자신의 생존 의미에 대한 자각
능력까지 마비시켜버리고 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요구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달콤한 결과들에 의해 이미 길들여진 사회, 이미
상품들로 전락해버린 인간들로 채워진 현대 사회에서 타인의 죽음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오늘도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돈의 가치를 역설해대고 그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 흔들어대며, IMF 시대에 신학 철학 외국문학에까지 정부가 재정
지원해야 하느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감히 이야기하자면 각성 없는 이 시대에 이미 죽어가는 우리의
의식이 IMF를 초래했다.

따라서 돈과 학문과 예술, 다시 말해 "유용한 것"과 "무익한 것" 사이의
천박한 구분과 단선적 대립이 경제의 파탄을 가져왔다.

유태인들을 보라.

그들은 물론 경제력으로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만큼이나 과거에 대한
기억의 보존과 그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노력에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당장 가시화할 수 있는 것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가치는 질식할
정도로 파시즘적이지 않은가.

-----------------------------------------------------------------------

<> 필자 약력

=<>프랑스 파리8대학 불문학박사
<>한국외대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
<>논문:2차 대전 해석을 둘러싼 유럽내의 쟁점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