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탁 < 종합기술금융 회장 >

한국인은 레테(Lethe) 강물을 마셨는가.

"레테"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강이다.

이 강물을 마시면 과거 일을 잊는다고 한다.

인간은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매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고, 해도 좋은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할 줄도 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그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 나아가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오늘과 같은 문명화된 사회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습성을 지니고 있다.

오래 전에 겪었던 뼈아픈 슬픔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차츰 잊어버린다.

기억하기조차 싫은 어떤 사건이나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는 조금씩
잊어 가는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 모른다.

실연의 경우도 그렇다.

원래 짝사랑에는 약이 없지만 흐르는 세월이 유일한 치료약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으로부터 차츰 잊혀져 가는 과거사는
인간으로 하여금 지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앞을 내다보면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앞서 소개한 그리스 신화에서 레테 강물을 마신 사람은 과거지사를 깡그리
망각하고 다른 세계로 가게 된다.

신화와 현실은 다르다.

현실에서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려도 되는 것은 아니다.

잊어버리더라도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것도 문제다.

오래도록 기억할 건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건 머릿속에 간직해야
할 것이다.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될 실수를 금방 잊어버리는 바람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실수를 되풀이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거의 뼈아픈 경험을 교훈 삼아 다시는 그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자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또 앞으로 그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이따금씩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다.

몇년전 하루아침에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단단히 결심을 했던가.

비록 시간과 돈이 더 들고 총체적인 경제성장이 더디더라도 이제부터는
안전제일의 기업문화와 사회문화를 가꾸어 가겠다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사업이라도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던
다짐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리고말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말이다.

IMF 경제위기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우리 경제는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한때 시중금리가 30%까지 올라갔는가 하면 대미 달러 환율도 2천원대로
치솟기도 했다.

재고와 설비투자가 각각 17.1%, 38.5%씩 줄어듦으로써 경제성장은 5.8%나
뒷걸음쳤다.

이렇게 경기가 극도로 위축되는 바람에 부도율이 한때 1.49%까지 올라가고
실업률도 8.7%까지 높아져 실업자가 무려 2백만명에 육박하기도 하였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경제위기를 당한 것을 치욕적인 일로 여기고 있다.

지난 40년가까이 승승장구하던 우리경제가 이렇듯 큰벽에 부딪친데 대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한탄하기도 했다.

국내외적으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무슨일이 있어도 그런일이 재발해서는 안된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설사 국민소득이 덜오르고 경제사회 발전속도가 더디더라도 빚이 많지않은
기업과 국가를 만들기 위해 씀씀이를 줄여 건전한 사회기풍을 조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우리는 어떤 상황인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할 것도 없이 각자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치욕적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경제위기를 우리는 벌써 잊어버리지나
않았는지.

반대로 그 때의 기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기우인지는 몰라도 우리 모두가 철석 같이 다짐한 내용을 금방 잊어버리고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리 모든 세상사가 돌고 돈다지만 되풀이할 게 있고 되풀이해선 안될 게
있지 않은가.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는커녕 여전히 과거부터 이어져온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삼복더위보다 더한 갑갑함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필자만이 아닐 것
이다.

"우둔한 자는 지난 잘못을 잊고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는 사람이지만
현명한 자는 지나간 잘못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이다"는 격언을 우리 모두 가슴깊이 새길 때라고 생각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