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저녁 7시 증권거래소 21층 대회의실.

투신.증권사 사장들이 수익증권 환매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긴급히
모였다.

회의를 주재한 투자신탁협회장은 "대우문제에 따른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조기에 제거하기 위해 금융기관의 환매금지를 무한정 지속할수 없다"며 운을
뗐다.

그뒤 "준비된"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내일부터 당장 수익증권 환매에 응한다는 것이었다.

단 대우그룹 채권및 CP(기업어음)에 대해서는 오는 2000년7월까지 환매연기
승인을 금감원에 신청하자고 제의했다.

이 모두가 금감원이 사전에 은밀하게 준비한 각본대로였다.

이날 회의는 금감원의 결정을 업계 자율건의로 포장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협회장의 말이 끝나자 회의장은 웅성거렸다.

이날 모인 50여명의 증권.투신사 사장 가운데 사전에 환매해제 방침을
통보받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장, 한숨을 쉬는 사장도 눈에 띄었다.

불만섞인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한 투신사 사장은 "그동안 환매를 자제하고 기다려왔던 개인고객들이 손해를
보게되는 게 아니냐"며 이번 조치의 불공정성을 꼬집었다.

13일부터 환매신청을 하는 개인과 기업들은 펀드에 편입된 대우그룹 채권분
만큼 기간별로 50~95%만 지급받기 때문이다.

투신협회장이 머뭇거리자 회의장에 참석한 김영재 금융감독위원회 대변인이
친절하게 나섰다.

"기다려온 고객은 다소 불리하게 됐지만 전체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

투신.증권사들은 지난달 26일 금융기관의 환매금지 조치이후 영업점을
찾아온 개인고객들에게 "별 일 없을 테니 안심하고 돌아가십시오"라고
설득해 돌려보냈다.

개중에는 돈을 찾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직원의 말을 믿고 발길을
돌렸다.

사실 대우사태후 투신업계가 무너지지 않고 굴러갈수 있었던 것도 1백조원
이상을 맡기고 있는 개인들의 환매자제 덕이 컸다.

그러나 이번 환매해제조치로 투신사들은 믿고 따랐던 고객들에게 등돌릴
처지가 됐다.

한 증권사 사장은 "고객들의 항의에 어떻게 해야할지 앞이 캄캄하다"고
말했다.

신뢰가 무너지게 될것을 걱정하는 사장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으니 회의를 빨리 끝내자"는 김 대변인의 말에 사장들은
말을 잊지 못했다.

사장들은 영문도 모르고 비상대기시켜 놓은 직원들과 대응책 마련을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신뢰를 저버리게 될 사장들의 발걸음이 가벼울리 없었다.

< 장진모 증권부 기자 jang@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