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 경북대 교수 / 기술경제학 >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씨름도"를 보면 등장인물들 모두의 시선이 씨름
장면에 쏠려있지만 단 한사람 엿장수만은 엿 사줄 사람 없나 하고 다른 쪽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

그 엿장수처럼 요즘 모두가 정치싸움이나 대우사태 혹은 물난리에 시선을
뺏기고 있는 세상에서 좀 다른 것도 보고 엉뚱한 곳에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그게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비중요성의 중요성"을 알아차리는
사회라야 내일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과학문화이다.

한국경제 위기극복은 뭐니뭐니해도 수출에서 찾을 수 밖에 없고, 수출을
위한 경쟁력은 과학기술에서 찾을 수 밖에 없으며, 과학기술은 역시 과학문화
진흥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제나마 과학문화라는 키워드를
챙기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한국과학문화재단으로부터 재미있는 그러나 쇼킹한 사실 하나를 전해
들었다.

일본에서 진행한 국제적인 공동연구팀이 소립자 뉴 트리노에 질량이 있다는
증거를 관찰하여 20세기 과학사의 한 성과로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공동 연구에는 일본인 미국인 과학자만이 아니라 한국인 과학자도
3명이나 참가했다.

그런데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이 연구성과를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반면 일본에서는 수상을 포함한 어느 정치가도 별로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일본의 신문들은 미국 대통령의 행동을 과학을 중시하고 장려
하는 미국의 과학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일본의 과학문화수준이
낮음을 개탄했다고 한다.

물혼 한국에서는 매스컴의 주목도 받지 못했고 따라서 한탄하는 일도
없었다.

한국은 그야말로 과학문화의 부재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어떻게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미.일의 과학문화의 차이가 과학기술 수준의 차이를 가져온 것이다.

박세리 선수가 골프대회에서 연이어 우승해 매스컴의 화려한 각광을 받으며
골프붐이 생기고 골프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것과 같은 현상을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기대할 수 없단 말인가.

최근 한국의 과학문화와 관련되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고 있다.

나라를 걱정하는 신자가 있어 하나님께 한국에 훌륭한 과학기술자 다섯명만
보내달라고 기도했더니 과연 다섯 명이 왔더라는 것이다.

먼저 갈릴레오가 왔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현실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소리만 하고 다니니
민심소란죄로 잡혀가 실성한 사람으로 외면당하고 만다.

이어서 뉴턴이 왔다.

그러나 뉴턴은 대학에서 교과서의 이론을 부정하는 소리만 하고 다니니
수업방해죄로 퇴학을 당해 과학자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이어 퀴리부인이 왔다.

그러나 남녀차별사회에서 퀴리부인은 과학공부나 과학실험도 못해 결국
가정부로 전락하고 만다.

이어서 에디슨이 왔다.

그러나 에디슨은 학교도 다니지 못했으니 연구기회를 가질 수 없고 결국
자동차 수리공으로 끝나고 만다.

마지막으로 아인슈타인이 왔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역시 중.고등학교 성적이 나빠 대학입시에 떨어져 학력
부재로 과학자의 길은 처음부터 막혀 버린다.

이것은 물론 사오정 시리즈 비슷한 우스갯소리다.

하지만 한국 과학문화의 부재를 절실히 상징하는 것 같아 웃다가도 가슴이
메일 지경이다.

바로 이러한 과학문화 부재가 한국의 과학기술입국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한국은 노동투입주도형 성장국면을 지나 자본투입주도형
성장국면에서 연구개발(R&D)주도형 성장국면으로 이행하지 못해 IMF관리체제
라는 폭풍을 만났던 것이다.

이제 금융위기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치유되어가고 있다면 하루 빨리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길, 즉 R&D주도형 성장의 길로 되돌아가 폭풍 속을
뚫고서라도 그 길을 달려가야 한다.

그동안 금융위기극복을 위한 기업구조조정과정에서 제일 먼저 R&D부분을
축소 내지 퇴장시키다 보니 한국의 R&D부분은 약 35%정도 후퇴하고 말았다.

사실 폭풍 속에서도 과학기술부분만은 축소 내지 퇴장시키지 말고 그냥
그대로 안고 버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과학문화의 부재탓이다.

지금도 은행하나 살리는데 5조~6조원을 쏟아붓고 있지만 정부 전체의 과학
기술 관련예산은 3조원 정도 밖에 안된다.

주무부처인 과기부의 예산은 7천8백억원 정도다.

추상적으로 지식입국 지식경제 운운 하면서도 막상 그 핵심인 과학기술은
너무나 푸대접을 받고 있고 공대생들은 고시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사회전반에 업적지향적(Goal-oriented)문화보다 지위지향적
(Status-oriented)문화가 판치고 있다.

과학문화의 부재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있을까.

김대통령은 이미 국민총생산(GNP)의 5%를 과학기술 투자에 쓰겠다고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사실 GNP의 5%는 너무 많고,내년부터 정부예산의 5%정도만이라도
과기예산으로 배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8.15 경축사에서 과학기술입국의 비전을 다시 한번
밝히고, 그것을 과학문화 진작으로 연결시켜야 할 것이다.

문화적 뒷받침이 없는 임시변통적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일본도 올해부터 3년간 과학문화진흥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려 한다.

한국의 과학문화 르네상스운동을 제창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