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프레도 파레토는 1848년 제노바 출신의 엔지니어로 파리에 망명중이던
라파엘 파레토 후작과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빌프레도는 파리에서 교육을 받다가 1858년에 부친을 따라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토리노의 폴리테크닉을 16세의 나이에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19세에는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으로 토리노대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토리노대학교의 엔지니어학교에 진학하여 1870년에 22세의 나이로
엔지니어 학위를 받게 되었다.

파레토는 엔지니어로,사업가로 활동하면서 당시에 만연하던 보호주의, 관세
장벽, 정부의 산업지원정책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자유무역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리고 그는 경제적 자유주의 이념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아담스미스
소사이어티의 창립멤버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한편 파레토는 2회에 걸쳐 의회 진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의회 진출이 좌절되자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국가, 그리고 민주주의
원칙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된 파레토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엘리트 이론을
만들어 이를 확산시키고자 노력했다.

파레토는 1890년에 당시 이탈리아의 최고 경제학자이던 판탈레오니와
교분을 맺으면서 경제학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무렵 파레토는 토스칸에서 가장 커다란 철강회사의 책임자로서 일했는데
회사의 운영이 나빠지자 1890년 7월에 그만뒀다.

그리고는 판탈레오니의 권고에 따라 왈라스의 경제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1892년 왈라스가 건강상의 이유로 로잔느대학의 경제학 강좌를 포기함에
따라 파레토는 다음해에 45살의 나이로 로잔느대학에 왈라스의 후임으로
임명됐다.

1906년 이태리어로 출간했다가 자신이 다시 교정하고 편집해서 1909년에
불어로 발간한 경제학 매뉴얼은 파레토의 엄밀한 이론, 철학적 기초 그리고
경험적 관찰이 조화롭게 나타난 대표적 저작이다.

파레토가 경제학 이론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일반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공헌은 효용 극대화에 대한 이론적 정의이다.

파레토는 "초기에 어떤 상태에 있더라도 약간의 움직임으로 인해 일부
사람의 후생이 증가하고 일부 사람의 후생이 감소하면 이런 움직임이 사회를
위해 유익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움직임일지라도 개인들이 누리는 효용을 동시에 증진
시켜 줄 수 없는 상황을 효용의 극대점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를 현대 경제학
에서는 파레토 최적이라고 부른다.

특히 그는 경쟁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자발적인 교환활동 결과 도달할 수
있는 시장에서의 균형이 파레토 최적이라는 후생경제학의 제1정리를 발표
했다.

이와 함께 파레토 최적이 초기 자원배분의 적절한 이전을 통해 일반균형으로
부터 얻어질 수 있다는 후생경제학의 제2정리를 보여줌으로써 현대 경제학의
중요한 이론적 초석을 제공했다.

박명호 < 한국외대 경제학교수 mhpark@san.ac.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