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아의 뒤에는 항상 문제부모가 있다던가?

자살의 유혹에 빠져있는 어머니와 가정폭력을 일삼는 술주정뱅이 아버지-.

그런 가정에서 자란 어린애의 심성이 얼마나 삐뚤어져 있을지 알만하다.

결손가정의 자녀를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를 보면 대개 양친의 한쪽만
일그러진 모습인데 "푸줏간 소년"의 경우는 양쪽 모두 구제불능이다.

어린 주인공 역시 천하의 악동이다.

부모를 잘못 만났지만 잡초처럼 굿굿히 자라는 모범소년의 이야기려니
했으나 정반대다.

가출-절도-폭력으로 얼룩진 소년기를 보내다가 끝내는 살인까지 저지른다.

소년이 보인 모범이란 푸줏간에서 일할 때의 잠깐일 뿐.

살인 방화범으로 상당기간 옥살이를 치른 뒤엔 이미 어른이 돼 있었지만
그의 표정엔 어떤 회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다.

도대체 이 영화가 의도한 메시지가 무엇인가.

정상가정에서 자라지 못하면 평생을 망친다는 경고인지.

아니면 결손가정의 어린이를 방치하면 사회악을 일으킨다는 경종인지...

그러면서도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강렬한 요소가 있다.

"푸줏간 소년"은 3류인생을 사는 불우소년의 유년기로 엮어져 있다.

60년대초, 아일랜드의 두메마을에서 일어난 일상사들을 꽤나 부풀려 놨다.

촌사람들의 입에서 "공산당"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핵실험장면까지
등장하는 등 냉전시대의 그늘진 세태가 간혹 보이지만 두메의 떠들석한
마을풍정이 더 흥미롭다.

오늘의 우리 주변사정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움과 질시가 있는가 하면 "왕따"도 판을 친다.

소년은 마을민들로부터 철저한 따돌림을 받다가 막판에선 믿고 의지하던
소꼽친구로부터 외면당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단절의 쓰라림을 안긴 동네아줌마를 "처벌"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관심을 끄는 부분은 소년나름의 왕따재판과 단죄의식이다.

자신을 따돌린 피고에 사형선고를 내려 놓고 그것을 집행하는 소년의 표정엔
어디에도 복수심이나 증오의 기색이 없다.

당연히 할 일을 한다는 생각인데 그 태연함에선 섬뜩함보다 비애가 앞선다.

그것은 한 철부지를 살인자로 만든 주변환경에 대한 서글픔이다.

소년이 보고 자란 환경과 겪은 수모가 그러 하건대 그의 비행만 탓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그런 측면에서 범죄까지 미워할 수 없게 만든 감독(닐 조단)의 솜씨가
돋보이는 영화라 하겠다.

주인공의 가슴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는 것은 엄마와 소꿉친구에 대한
그리움이다.

어린 마음을 떠받치는 두개의 정신적 기둥이 모두 무너진 충격이 살인으로
까지 몰고 간다.

주인공이 아무리 "상처받은 영혼"이라 해도 살인과 천진함을 결부시킨 것은
지나치다.

범죄학자나 영화윤리위원이 문제 삼음직한 위험한 발상이다.

이 영화에서 처벌받아야 할 진짜 범인은 주인공이 아닌 그의 주변인물들이다

봉변의 앙갚음으로 청부 폭력배를 동원하는 동네아줌마와 소년을 변태적인
성의 노리개로 삼는 성직자가 그들이다.

추문을 숨겨 주는 대가로 방면을 흥정하는 수도원이나 그의 죽마고우에게
배신을 유도하는 학교기숙사도 같은 부류다.

그런 악의 세력은 멀쩡한데도 철없는 개구쟁이만 죄값을 치른다는 설정은
상징성이 강하다.

그것은 부도덕한 강자가 득세하고 순진한 약자는 밀리기도 하는 오늘의
세태와 무엇이 다른가.

< 편집위원 jsri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