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 소설가 / 경제평론가 >

지금 우리 사회에선 갖가지 음모론들이 활짝 펴서 기괴한 빛깔들을 뽐내고
있다.

검찰이 일벌백계를 겨냥하고 조폐공사의 불법파업을 유도했다는 주장으로
번지고 있다.

이른바 "옷 로비"는 대통령부인과 총리부인까지 연루됐다는 설이 야당에
의해 제기됐고 곧 비싼 미술 작품들까지 오갔다는 설로 확대됐다.

음모론의 백미는 역시 서해에서 우리 해군이 북한 해군과 교전한 것이
현정권과 북한과의 어떤 묵계나 양해 아래 진행됐다는 "신 북풍설"이다.

원래 "북풍설"이 여러 번 나온 얘기인데다 지난 번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가 북한과 접촉해서 자신에 불리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설까지 돌았던 참이라 "신 북풍설"은
그럴 듯하게 들린다.

게다가 예년엔 월경해서 조업하던 북한 어선들이 남한 경비정들이 접근하면
도망쳤으나 올해엔 그냥 조업했다는 외국 방송사의 보도는 그런 음모론에
무게를 실어준다.

이어 야당은 현대 그룹이 금강산 관광 사업의 허가료로 북한에 지급하는
엄청난 돈에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가 북한에 약속한 대가가 포함됐을
가능성을 꺼냈다.

현대 그룹이 북한과 맺은 계약을 제 3자가 속속들이 알 수 없으므로 그런
추측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런 음모론들이 서로 얽혀서 상승 작용을 하는 판에 오락 산업은 나름의
음모론들을 내놓아 뒤숭숭한 우리 현실에 음산한 빛을 던진다.

오락 산업이 전파하는 음모론들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물론 "미확인 비행
물체(unidentified flying objects : UFO)"다.

외계인들이 모는 비행 접시가 지구에 착륙하거나 추락했지만 정부나
과학계가 그 사실을 숨겨왔다는 얘기다.

1947년에 미국 뉴 멕시코 주 로스웰의 목장에 외계인이 탄 비행접시가
추락했다는 "로스웰 사건"으로 태어난 뒤 질긴 생명력을 보여온 이 음모론은
요즈음 텔레비전 연속극 "X파일"의 큰 성공에 힘입어 다시 기세 좋게 퍼지고
있다.

외계인들에 관한 그런 음모론의 뿌리는 외계인들이 이미 지구에 도착해서
인류를 지배하고 있다는 편집병이다.

미국 저술가 찰스 포트의 "우리는 소유물이다(We are property)"라는 구호로
멋지게 요약된 그런 편집병은 1931년에 나온 에드먼드 해밀턴의 "지구 소유자
들(The Earth-Owners)" 이래 많은 과학소설 작품들의 주제가 됐다.

환상소설에선 그런 작품들이 "역사 환상소설(fantasies of history)"이라는
하위 장르를 이룬다.

음모론에 등장하는 세력들은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바뀐다.

현대에선 유태인들, 프리 메이슨 회원들, 무기 상인들, 나치 생존자들,
그리고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소련의 국가안보위원회(KGB)가 차례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음모론의
힘이다.

그 힘의 핵심은 음모론이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어떤 존재나 세력의 음모라고 얘기하면 그런 존재나
세력에 대한 설명이 따라야 하므로 실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그래도 음모론은 복잡한 일들을 일단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설명은 어렵고 복잡한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음모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나 세력을 상정하므로 좀처럼
논파되지 않는다.

음모론이 늘 인기가 높고 생명이 강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음모론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라기 좋은 토양을 만났다.

경제적 위기로 사회가 불안한 데다 한 천년기가 끝나가는 때라 종말론과
같은 비과학적 주장들이 호소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음모론들이 갑자기 큰 세력을
얻은 것에 대해선 현 정권의 책임이 크다.

현 정권이 단서를 제공했거나 일을 잘못 다루어서 음모론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특히 심각한 내용을 지닌 음모론들이 "햇볕 정책"과 관련됐다는 사실을 현
정권은 주목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 정권은 음모론들이 당장 성가시다는 데만 마음을 쓸 뿐
음모론들이 큰 세력을 얻는 현상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시민들의 다수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특별 검사제를 "불법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서만 일회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이것은 결코 작지않은 잘못이다.

음모론들이 널리 퍼지면 사회가 건강할 수 없다.

합리적 설명을 찾는 대신 손쉬운 음모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민들은
편집병과 냉소주의에 물들게 마련이고 미신과 사이비 종교에 현혹되기 쉽다.

당장 정부의 정책들이 불신을 받게된다는 것도 작지않은 문제다.

정부는 지금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음모론들을 줄일 길을 진지하게 찾아야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