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아고라(광장)는 정치 집회장이면서 동시에 온갖 상품의
경매장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경쟁 입찰이 발달했던 것은 역시 민주적인 조직만이 경쟁
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절차적 투명성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대한생명 공개매각을 둘러싼 정부와
금융감독위원회의 정책 혼선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정부와 금감위는 대한생명의 매각을 둘러싸고 벌써 몇번씩이나 입찰 자격을
변경하는등 행정의 난맥상을 보여왔다.

최근 실시된 2차 입찰 역시 "적당한 응찰자를 찾지 못했다"는 금감위의
간단한 설명 만으로 다시 유찰된 것은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다.

그동안의 유찰 경과와 오는 28일까지 제안서를 내도록한 3차 입찰 자격을
보면 금감위가 특정 낙찰자를 염두에 두고 경쟁입찰이라는 형식요건 만을
갖추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또 낙찰가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내심 탈락을 기정사실화 해놓은 허수의
경쟁자를 들러리로 내세우려는 것이라는 일부의 지적도 없지 않다.

5대 그룹에 대해 "외국 자본과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경영권을 포기하는
조건"이라면 입찰이 가능하도록 한 것만 해도 그렇다.

지난 2차 입찰에서 특정 대기업의 응찰을 불허한 것도 무리가 있었지만
"외자와의 합작"을 새로운 응찰 자격으로 내세운 이번 조치도 결코
정당하다고는 볼 수 없다.

높은 부채비율 때문에 응찰 자격이 없다고 했다가 "돈만 내고 경영권은
포기하라"고 한다면 이는 누가 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 자의적 기준이라
할 것이다.

지금 대한생명 매각과 관련해 특정 응찰자의 유.불리를 논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경쟁입찰이란 사전에 공개된 조건하에서 누구든 동등하게 권리를
다툴 수 있도록 함으로써 최적의 가격을 찾아내자는 과정에 다름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제일은행 매각도 그렇거니와 이번 대한생명 입찰 과정을 보노라면 당국이
과연 이 경쟁입찰을 조직하고 관리할 만한 능력과 의사를 갖고 있는지조차
의심을 갖게 된다.

금융감독위원회에 대해서는 차제에 또 다른 주문사항이 없을 수 없다.

금융감독과 산업정책이 혼동되고 금융감독이 대기업 정책의 하위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이 역시 통상적인 절차와 범위를 넘어선 행위라 할 것이다.

더욱이 그 조차도 조령모개식의 자의적 잣대가 적용된다면 이는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경쟁입찰 제도는 합목적성이 아니라 절차적 정당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금융 당국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