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는 역시 정책을 해야한다"는 말이 있다.

업계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업무를 다루는, 겉보기에 화려하고 힘이 있는
듯한 자리보다 하나마나한 원론이나 읊조리는 자리가 낫다는 얘기다.

개각과 인사이동으로 새 스타가 떠오를 때마다 옛 기획원과 재무부를 대비
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서석준 김재익 강경식 이진설 이형구 진념 김인호 한이헌 이석채 강봉균
전윤철 이기호 등등.

80년대 이후 계속되고 있는 기획원출신들의 행진은 따지고보면 업무의 특수
성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금융사고 등 사회적 물의가 빚어지는 사건이 터져도 업무성격상 다른 부처
실무관료들과는 달리 휘말려 꺾여지지 않았다는 점, 고유의 권한이라곤
사실상 없기 때문에 다른 부처와의 논쟁에서 이론적으로 우세하지 못하면
설 자리가 없었다는 점이 기획원관료들을 크게한 배경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종합적인 시각을 갖도록 훈련받아왔다고 하겠고,
어떻게 보면 척박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이론적인 전투력이 강해졌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시대는 옛 기획원관료들의 것인듯한 느낌이다.

지난주말 발표된 경제정책조정회의 운영방안은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전경제부처 장관을 멤버로하는 월1회의 정례회의는 과거의 경제장관회의처럼
의례적인 성격을 띠게될 것이고, 실질적인 경제현안은 재경 기획예산 공정
거래위 금감위 국무조정실장과 경제수석비서관을 상임멤버로하는 수시회의에
서 조율될 것이란 점에서 그러하다.

과거의 경제장관협의회 기능을 하게될 수시회의 상임멤버 6명중 네 사람이
기획원출신인 셈이다.

산업자원 건설교통 정보통신 농림 등 업계관련 장관들은 한명도 수시회의
상임 멤버가 아니다.

정덕구 장관이 불만을 나타냈다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산업자원부로서는
아마도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상무부가 산업통계나 편제하는 기구가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엄격한 의미의 "산업정책"이라는게 WTO시대에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운 대목도 없지 않기는 하지만 옛 상공부시절을 기억하는 산자부
관료들은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경제부처를 수시회의 상임멤버와 그렇지않은 부처로 계층화하는
듯한 감을 주는 것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과거의 경제장관협의회도 부총리외에 재무장관이 사실상 고정멤버였지만,
이는 돈을 풀건 묶건 어떤 경제정책에서도 재무부가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
이지 상임멤버를 따로 정해놨던 결과는 아니다.

공룡화된 재경원체제 때문에 경제정책 토론의 장이 없어졌었다는게 일반적인
지적이지만, 상임멤버가 정해진 수시회의가 또다른 차원에서 토론을 위축시키
는 꼴이 되지는 않을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수시회의 상임멤버의 정책 컬러가 하나같이 매크로취향의 한 색깔이고 보면
더욱 그런 우려를 떨쳐버리기 어렵다.

수시회의가 상임멤버외에 안건관련 중앙행정기관장이 참석하는 이른바 "6+1
체제"로 운영된다지만, 과연 이런 분위기에서 업계관련부처 장관들이 얼마나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정말 의문이다.

업계관련부처에서 들고나갈 안건은 그 성격상 매크로부처에 대해 뭔가 도와
달라는 내용이 될게 분명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비교열위의 입장에 서게
될게 십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매크로를 다루는 부처의 주장은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대체로 관념적이거나
현실과 괴리되는 성향을 보이게 마련이다.

정재석씨가 상공장관때 경제장관협의회 자리에서 기획원과 재무부에다 대고
"심산유곡에서 목탁치는 소리 그만하라"고 역정을 낸 일도 있다.

경제장관들의 정책토론은 시각을 달리하는 각 부처의 의견이 거리낌없이
개진되고 그 자리에서 정책이 조정될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

얘기를 하건말건 결론이 뻔한 분위기, 매크로적 시각만이 지상이어서는
곤란하다.

바로 그런 시각의 기우가 업계는 물론 관가에서도 없지 않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경제정책조정회의 수시회의는 고정멤버 없이 현안관련 관계부처장관들을
재경장관이 소집하는 형식으로 운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업계관련부처에 불필요한 소외감을 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 회의장소도 우리 경제정책의 오랜 산실인 재경장관부속실, 곧 녹실로
고정하는 것이 좋다.

취재기자들에 대한 보안을 핑계로 이 호텔 저 호텔로 옮겨다니는 것은
문제다.

중요한 국가정책을 경우에 따라서는 도청우려도 있는 그런 곳에서 논의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녹취록이나 의사록 등도 있어야 할 것은 당연하다.

경제정책 성안과정의 기록이 있어야 하고 일정기간후에는 이를 공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강봉균 경제팀의 정책조정회의 운영에 대한 기대가 크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