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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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림 회장의 연임 ]
요란하게 출범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 2년째인 63년 상반기, 정치.경제
사정은 최악의 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군정연장"이냐 "민정이양"이냐를 놓고 여야대결은 격화되고 미국과의
관계도 악화됐다.
5.16직후 2억7천만달러나 됐던 외화보유고는 38만달러만 남아 문자 그대로
국고가 바닥났다.
더 이상 5개년계획을 추진할 재원이 없어진 것이다.
민간 경제계를 위시, 당시 경제기획원 관료들마저 5개년계획 수정론을
조심스럽게 들먹였다.
요즘 IMF난국을 한국동란 이후 "최대의 위기" 운운한다.
하지만 내 기억으론 63년 사정이 훨씬 심각했던 것 같다.
지금의 IMF위기는, 물론 대량 실업자 발생 등 나름대로 힘들긴 하다.
그러나 소비와 투자를 줄이면 우선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63년 당시는 줄일래야 줄일 것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전해인 62년의 농사는 대흉작이었다.
많은 농어민과 도시영세민은 기아선상에서 헤맸다.
이것은 나만의 기억이 아니다.
당시 경제계 지도자였던 이병철, 전택보 씨 등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삼성의 이병철 사장은 한국일보(63년5월27일)에 당시 사태를 이렇게
통탄하고 있다.
"정치 혼미 속에서 지도자가 방황하고 경제는 불안하고 사회가 혼란하니,
이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전택보 천우사 사장은 경향신문(63년1월4일, 5일)에 이렇게 썼다.
"신문 사회면을 보면 매일같이 생활고로 자살, 피살 등 험악한 사회상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어제 오늘 갑자기 생긴 일은 아니다.
최근 더욱 불안감을 느끼게 된 것은 "화폐개혁"과 불건전한 재정금융 정책
그리고 미곡흉작으로 인하여 인플레가 급진되어 가는 도중에 외환부족으로
물자수입이 격감됨으로써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병철, 전택보 사장 등은 기업인이기 때문에 정치나 세태를 논할 때 표현을
극도로 절제하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 두사람도 63년을 전후한 사태에서는 최상급의 형용사를 숨기지
않았다.
그만큼 당시 사정은 어려웠다.
헐벗고 힘없는 서민들에겐 더 했다.
하루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불안한 상태였다.
이 무렵 나의 고민은 그래서 "우리 경제의 새 진로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에 집중됐다.
생각도 많이 했지만 경제인협회 회장단과 대화도 많이 했다.
특히 이병철 전택보 사장등을 수시로 찾았다.
이들의 지도하에 "전환기 한국경제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하루 빨리 국민들에게 비전과 목표, 그리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새 진로를
제시할 목적이었다.
경제.기술조사센터(현 한국경제연구원)의 자문위원들도 풀가동했다.
63년 여름, 가을로 넘어가며 이런 초긴급과제들에 사무국은 총동원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제인협회내의 소위 "강경파"는 엉뚱한 계책을 꾸미고 있었다.
이들은 남산(중앙정보부)과 내통해 이정림회장 대신 남궁련사장(극동정유
창업주)을 새 회장으로 선임하자는 모사를 구체화하고 있었다.
회원 정보통인 윤태엽 총무부장(후에 전경련 상임부회장 역임)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당시 협회 내부사정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나마 필요할 것 같다.
62년9월29일 열린 총회에서 이한원, 심상준사장 등은 자기들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병철회장의 재선을 저지하고 남산의 힘을 빌어 온화한
성격인 이정림사장(대한양회)을 2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자기들이 좌지우지하려 했던 이정림회장도 "고지식"하게 바른 길을
걸었다.
이 회장은 오히려 그 어려운 여건하에서 사무국과 함께 경제.기술조사센터
창설, 수출산업촉진위원회 설립 등의 일을 해나갔고 여야 격돌상태에서
"거중조정" 등을 잘 처리, 경제인협회의 대내외 위상을 크게 높였다.
그래서 이들은 지난주에 언급한대로 사무국장을 견제할 목적으로 진학문
선생을 상근부회장으로 앉혔다.
그리고 남궁련 사장을 새 회장으로 선출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남산을
개입시켰다.
이에 관련한 두가지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정기총회(63년7월29일)날 아침 6시에 이정림회장이 내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만나자는 전갈이었다.
7시30분에 대한양회 사무실로 갔다.
이사장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
지극히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입을 뗐다.
"남산에서 회장을 그만 두라고 하네"
"남산은 누굴 밀고 있는데요"
"남궁련 사장을 시키래"
나는 전신에 경련이 일어나는 걸 느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회장님. 회장님이 경제인협회 회장이 되신 경위는 제가 알 바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이 회장님이 물러나면 경제인협회는 와해됩니다. 건전한
회원들은 회장님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먼산을 보는 이 회장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이 회장을 연임시키는데는 윤태엽 총무부장도 한 몫을 했다.
같은 날 아침 이한원사장은 윤부장을 자기집에 초대해 아침식사를 같이
했다.
그러면서 남궁련 사장에게 투표할만한 회원들에게 전화해 줄 것을 부탁했다.
말이 부탁이지 압박이자 강요였다.
윤부장은 순간 기지를 발휘했다.
남궁 사장을 지지하고 있던 회원만을 골라 그 자리에서 전화를 돌렸다.
"전화를 하지 않아도 올 사람들"에게 시늉만 낸 셈이다.
솔로몬의 지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건전한 회원"들이 더 많았다.
이날 총회에서 이정림 회장은 27대 23으로 재선됐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7일자 ).
요란하게 출범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 2년째인 63년 상반기, 정치.경제
사정은 최악의 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군정연장"이냐 "민정이양"이냐를 놓고 여야대결은 격화되고 미국과의
관계도 악화됐다.
5.16직후 2억7천만달러나 됐던 외화보유고는 38만달러만 남아 문자 그대로
국고가 바닥났다.
더 이상 5개년계획을 추진할 재원이 없어진 것이다.
민간 경제계를 위시, 당시 경제기획원 관료들마저 5개년계획 수정론을
조심스럽게 들먹였다.
요즘 IMF난국을 한국동란 이후 "최대의 위기" 운운한다.
하지만 내 기억으론 63년 사정이 훨씬 심각했던 것 같다.
지금의 IMF위기는, 물론 대량 실업자 발생 등 나름대로 힘들긴 하다.
그러나 소비와 투자를 줄이면 우선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63년 당시는 줄일래야 줄일 것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전해인 62년의 농사는 대흉작이었다.
많은 농어민과 도시영세민은 기아선상에서 헤맸다.
이것은 나만의 기억이 아니다.
당시 경제계 지도자였던 이병철, 전택보 씨 등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삼성의 이병철 사장은 한국일보(63년5월27일)에 당시 사태를 이렇게
통탄하고 있다.
"정치 혼미 속에서 지도자가 방황하고 경제는 불안하고 사회가 혼란하니,
이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전택보 천우사 사장은 경향신문(63년1월4일, 5일)에 이렇게 썼다.
"신문 사회면을 보면 매일같이 생활고로 자살, 피살 등 험악한 사회상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어제 오늘 갑자기 생긴 일은 아니다.
최근 더욱 불안감을 느끼게 된 것은 "화폐개혁"과 불건전한 재정금융 정책
그리고 미곡흉작으로 인하여 인플레가 급진되어 가는 도중에 외환부족으로
물자수입이 격감됨으로써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병철, 전택보 사장 등은 기업인이기 때문에 정치나 세태를 논할 때 표현을
극도로 절제하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 두사람도 63년을 전후한 사태에서는 최상급의 형용사를 숨기지
않았다.
그만큼 당시 사정은 어려웠다.
헐벗고 힘없는 서민들에겐 더 했다.
하루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불안한 상태였다.
이 무렵 나의 고민은 그래서 "우리 경제의 새 진로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에 집중됐다.
생각도 많이 했지만 경제인협회 회장단과 대화도 많이 했다.
특히 이병철 전택보 사장등을 수시로 찾았다.
이들의 지도하에 "전환기 한국경제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하루 빨리 국민들에게 비전과 목표, 그리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새 진로를
제시할 목적이었다.
경제.기술조사센터(현 한국경제연구원)의 자문위원들도 풀가동했다.
63년 여름, 가을로 넘어가며 이런 초긴급과제들에 사무국은 총동원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제인협회내의 소위 "강경파"는 엉뚱한 계책을 꾸미고 있었다.
이들은 남산(중앙정보부)과 내통해 이정림회장 대신 남궁련사장(극동정유
창업주)을 새 회장으로 선임하자는 모사를 구체화하고 있었다.
회원 정보통인 윤태엽 총무부장(후에 전경련 상임부회장 역임)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당시 협회 내부사정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나마 필요할 것 같다.
62년9월29일 열린 총회에서 이한원, 심상준사장 등은 자기들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병철회장의 재선을 저지하고 남산의 힘을 빌어 온화한
성격인 이정림사장(대한양회)을 2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자기들이 좌지우지하려 했던 이정림회장도 "고지식"하게 바른 길을
걸었다.
이 회장은 오히려 그 어려운 여건하에서 사무국과 함께 경제.기술조사센터
창설, 수출산업촉진위원회 설립 등의 일을 해나갔고 여야 격돌상태에서
"거중조정" 등을 잘 처리, 경제인협회의 대내외 위상을 크게 높였다.
그래서 이들은 지난주에 언급한대로 사무국장을 견제할 목적으로 진학문
선생을 상근부회장으로 앉혔다.
그리고 남궁련 사장을 새 회장으로 선출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남산을
개입시켰다.
이에 관련한 두가지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정기총회(63년7월29일)날 아침 6시에 이정림회장이 내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만나자는 전갈이었다.
7시30분에 대한양회 사무실로 갔다.
이사장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
지극히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입을 뗐다.
"남산에서 회장을 그만 두라고 하네"
"남산은 누굴 밀고 있는데요"
"남궁련 사장을 시키래"
나는 전신에 경련이 일어나는 걸 느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회장님. 회장님이 경제인협회 회장이 되신 경위는 제가 알 바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이 회장님이 물러나면 경제인협회는 와해됩니다. 건전한
회원들은 회장님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먼산을 보는 이 회장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이 회장을 연임시키는데는 윤태엽 총무부장도 한 몫을 했다.
같은 날 아침 이한원사장은 윤부장을 자기집에 초대해 아침식사를 같이
했다.
그러면서 남궁련 사장에게 투표할만한 회원들에게 전화해 줄 것을 부탁했다.
말이 부탁이지 압박이자 강요였다.
윤부장은 순간 기지를 발휘했다.
남궁 사장을 지지하고 있던 회원만을 골라 그 자리에서 전화를 돌렸다.
"전화를 하지 않아도 올 사람들"에게 시늉만 낸 셈이다.
솔로몬의 지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건전한 회원"들이 더 많았다.
이날 총회에서 이정림 회장은 27대 23으로 재선됐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