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항산 무항심 결의문 발표 >

63년 3월 19일 일본 수출산업을 시찰하던 도중 나는 사무국의 연락을 받고
급거 서울로 돌아왔다.

3일뒤인 22일 정국위기 대처방안을 마련을 위한 긴급임시총회가 소집됐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경제인협회는 당분간 정치에는 초연하고 경제발전에 전념해야한다
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폭풍처럼 몰아치는 국내 정치상황은 이런 소망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다소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63년에 접어들자 5.16 주체들은 사분오열 됐다.

"권력" 앞에는 생사를 같이한 동지도 선후배도 의리도 없었다.

정적만 있을 뿐이었다.

당시의 한국상황을 미국 안보회의는 케네디대통령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물론 나중에 알려진 내용이다)

"지난 수주동안 한국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워낙 급속도로 진행되어 반박정희
세력-함경도 군맥 야당 군수뇌부 등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거나
거세됐다. 이 사태는 박정희가 꾸민 것으로 그는 쿠데타 음모를 조작하여
민정참여 노선으로 복귀하려 하고있다"(조갑제, "박정희 생애")

일련의 사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박정희가 2월 18일 발표한 성명이다.

그는 "새 정부가 5.16의 정당성을 인정해 정치 보복하지 말 것" 등 9개항을
받아들이면 민정에 참여치 않겠다고 선언했다.

곧 이어 2월27일 정당대표 27명과 군 대표들이 모여 이색적인 "2.18 성명
수락 선서" 모임까지 엄숙하게 열었다.

그런데 돌연 박정희는 3월16일 "정당의 난립, 정치인의 이합집산, 추잡한
파쟁" 등 정계의 혼란을 이유로, 4년 군정연장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발표했다.

국내외 여론은 일시에 들끓었다.

미국은 군정연장을 반대했고, 경제원조 중단설까지 흘렸다.

박정희는 3월19일 군정연장 제의를 놓고 최고회의 사무실에서 윤보선
전대통령, 장택상 전 국무총리, 김도연 초대 재무장관, 김순연 전 법무장관,
이범석 전 국무총리 등 5명의 정치지도자들과 설전을 벌였다.

이 설전은 이튿날까지 계속됐고 같은날 오전 윤보선, 허정(전 과도정부
수반) 두 사람은 서울시청 부근에서 30여분간 시위하다 경찰의 제지를
당했다.

국민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경제도 말이 아니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그렇지 않아도 문제투성이인 경제, 특히 민생은 파탄날
지경이었다.

3월21일 한국경제인협회는 긴급이사회를 가졌다.

안건은 다음날 임시총회에 상정할 "정국수습에 대한 본회대책"이었다.

이사회의 공기는 무거웠고 모두들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경제를 위해서는 정치 안정이 필수인데 박정희와 야당의 격돌은 마주
달려오는 기관차처럼 정면 충돌할 형국이었다.

여기다 미국 원조 중단설까지 나오고 있으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사진은 국민의 자격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힘을 다해 사태해결에
보태야 한다는 원론적인 결론을 맺었다.

그리고 여야 정치인에게 혼란수습과 민생안정 방안 마련을 촉구하는 결의문
을 다음날 발표키로 했다.

결의문 작성은 사무국장인 나에게 위임됐다.

결의문은 사회 각계 각층의 공명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이 돼야했다.

또 국민의 뜻을 모아 "힘있는 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자면 말 못하는 절대 다수 국민의 소리를 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경제인들이 아니 "장사꾼"들이 주제넘게 정치에 관여하면서
날뛴다는 비난에 구실을 주는 내용이나 어구는 절대 피해야 했다.

나는 이를 염두해 두고 3월22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결의문을 써 내려갔다.

내용은 이렇다.

"본회는 현하 혼미상태에 있는 정국을 맞아 중단할 수 없는 민생안녕을
국민과 더불어 희구하는 나머지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공표하는 바이다.
첫째, 정국의 혼란은 국민으로 하여금 항산과 항심을 갖추는 데 어렵게 할 것
이며(...) 민생조달의 동맥인 경제활동에 치명적 타격을 초래할 수 있음을
위정자와 사회지성이 유의할 것을 요망하고(...). 둘째, 정부당국이나 정치인
은 민의 소재와 내외정세를 현명하게 살펴 호양의 정신으로 현 시국을 수습
하고 민심의 안정을 회복시키는데 다할 것(...). 셋째, 현 정국에 관련하여
최근 외신이 밝힌 한국에 대한 미국원조의 일시중단 운운이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우방 미국의 원조가 한 정권이나 몇몇 정치인을 위해
주어질 수 없고 한국국민 전체의 생활 향상에 목표가 있는 만큼(...) 원조
당국은 차제에 원조 중단설이 사실이 아님을 뚜렷이 밝히는 동시에 현 경제
실태를 고려하여 급속히 추가 원조를 해 줄 것을 요망(...). 우리는 시국이
중대하면 할수록 경제건설의 역군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여하한 난관이
있어도 현신과 진군을 잠시라도 멈추지 않을 것을 전국민에게 호소하고(...)
경제인도 함께 다짐하는 바이다"

경제인협회가 정치분쟁에 관여하는 의견을 발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결의문을 각 신문에 전문광고로 발표한 후 그 반응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첫 반응은 국민의 뜻을 잘 반영했다는 것이고, 곧이어 몇몇 신문은 "항산
없이는 항심이 없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사설에서 인용하면서 경제계 주장에
공감했다.

그런데 어떤 신문이 경제인의 정치 관여를 빗대어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는 치기어린 가십을 실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