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노트] (20세기를 이끈 경제학자들) (12) 스티글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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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순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jisoon@snu.ac.kr >
"경제학자는 좋은 사람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냉정하다거나 물질적인 것을
중시한다거나 계산에 밝다는 이유를 들어, 경제학자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경제학자가 좋은 사람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경제학이
과연 유용한 학문인가라는 물음이며,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강한 "예"이다"
- 조지 스티글러의 "고삐 풀린 경제학자의 회고록"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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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는 좋은 사람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확신에 차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사람 스티글러야 말로 가까이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며 말과 글에 유머와 재기가 넘쳐나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스티글러는 1911년 미국 서북부 시애틀 교외의 조그만 도시에서, 바바리아
에서 이민 온 아버지와 항가리에서 이민 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유럽계 이민 2세다.
그는 태어나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매우 자유로운 시절을 보냈는데 특히
소년단에 가입하여 틈만 있으면 산과 강과 바다를 누비고 다녀 스스로의
말대로 행복하고도 아름다운 소년기를 보냈다.
그런 스티글러가 공부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워싱톤 대학교를
마치고 노스웨스턴 대학원을 잠시 거쳐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
때였다.
시카고 대학에서 스티글러는 프랭크 나이트, 제이콥 바이너, 헨리 시몬스
등을 스승으로 그리고 밀턴 프리드먼과 알렌 월리스 등을 동료로 둔 매우
행복한 학생시절을 보냈으며 1938년에 경제학설사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1936년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교수로서의 첫 발을 내딛은 후 1938년
부터는 미네소타 대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2차대전이 발발하자 동원되어
콜롬비아 대학에 근거를 둔 통계연구회의 일원으로 1945년까지 일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1947년부터 1958년까지는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나 1958년에 시카고 대학으로 옮긴 이후에는 1991년에 작고하기까지
그곳에서 시카고학파의 거목으로 남았다.
스티글러는 평생에 걸쳐 교내행정업무나 학교 밖의 일을 멀리하여, 35세 때
어머니가 네 신분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아주 자랑스럽게 교수라고 대답
하였는데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후 어머니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그
때나 마찬가지로 교수라고 대답했다가 그럼 십 년 동안 아무런 승진도
못했단 말이냐는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경제학설사로 학위를 받은 스티글러는 교수가 된 이후 경제학설사에 대한
관심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경제학의 다른 방면에 대해 깊은 학문적 관심을
가졌는데, 1938년부터는 여러 편의 가격이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46년에는 선형계획에 관한 책을 출간하였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는 산업조직론에 관심을 가져 경쟁과정에서 살아남는
기업의 규모가 바로 기업의 적정규모라는 이론을 발표하였으며, 동일한
상품이 경우에 따라 매우 상이한 가격에 팔리는 이유가 정보의 차이에 있음을
밝혀 1961년에는 정보의 경제학이라는 대작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그후 불확실성하의 경제분석 및 정보경제학이라는 경제학의 새로운
분야를 여는 계기를 제공하여 경제학을 크게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데 공헌
하였다.
1960년대에는 정부의 규제정책을 실증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에 몰두하였으며
특히 독점의 폐해가 생각보다 큰 것이 아님을 보여 경제학자와 일반인이
지녔던 독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불식시키는데 공헌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관심이 정치행위의 영역으로 확대되어 정치활동 역시
그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합리적인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이는데 성공하였다.
1982년에 노벨상을 받은 스티글러는 시카고 대학시절 만난 연인 마가렛 맥과
결혼하여 슬하에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애들이 어렸을 때는 물론 장성하여
손자 손녀를 본 이후에도 매년 카나다의 한적한 호숫가에 자리잡은 초막에
모여 3대가 여름을 같이 보낼 정도로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으며 1970년
그때까지 해로하던 부인이 작고한 것도 온 가족인 모인 그 초막에서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9일자 ).
"경제학자는 좋은 사람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냉정하다거나 물질적인 것을
중시한다거나 계산에 밝다는 이유를 들어, 경제학자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경제학자가 좋은 사람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경제학이
과연 유용한 학문인가라는 물음이며,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강한 "예"이다"
- 조지 스티글러의 "고삐 풀린 경제학자의 회고록"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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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는 좋은 사람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확신에 차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사람 스티글러야 말로 가까이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며 말과 글에 유머와 재기가 넘쳐나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스티글러는 1911년 미국 서북부 시애틀 교외의 조그만 도시에서, 바바리아
에서 이민 온 아버지와 항가리에서 이민 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유럽계 이민 2세다.
그는 태어나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매우 자유로운 시절을 보냈는데 특히
소년단에 가입하여 틈만 있으면 산과 강과 바다를 누비고 다녀 스스로의
말대로 행복하고도 아름다운 소년기를 보냈다.
그런 스티글러가 공부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워싱톤 대학교를
마치고 노스웨스턴 대학원을 잠시 거쳐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
때였다.
시카고 대학에서 스티글러는 프랭크 나이트, 제이콥 바이너, 헨리 시몬스
등을 스승으로 그리고 밀턴 프리드먼과 알렌 월리스 등을 동료로 둔 매우
행복한 학생시절을 보냈으며 1938년에 경제학설사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1936년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교수로서의 첫 발을 내딛은 후 1938년
부터는 미네소타 대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2차대전이 발발하자 동원되어
콜롬비아 대학에 근거를 둔 통계연구회의 일원으로 1945년까지 일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1947년부터 1958년까지는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나 1958년에 시카고 대학으로 옮긴 이후에는 1991년에 작고하기까지
그곳에서 시카고학파의 거목으로 남았다.
스티글러는 평생에 걸쳐 교내행정업무나 학교 밖의 일을 멀리하여, 35세 때
어머니가 네 신분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아주 자랑스럽게 교수라고 대답
하였는데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후 어머니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그
때나 마찬가지로 교수라고 대답했다가 그럼 십 년 동안 아무런 승진도
못했단 말이냐는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경제학설사로 학위를 받은 스티글러는 교수가 된 이후 경제학설사에 대한
관심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경제학의 다른 방면에 대해 깊은 학문적 관심을
가졌는데, 1938년부터는 여러 편의 가격이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46년에는 선형계획에 관한 책을 출간하였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는 산업조직론에 관심을 가져 경쟁과정에서 살아남는
기업의 규모가 바로 기업의 적정규모라는 이론을 발표하였으며, 동일한
상품이 경우에 따라 매우 상이한 가격에 팔리는 이유가 정보의 차이에 있음을
밝혀 1961년에는 정보의 경제학이라는 대작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그후 불확실성하의 경제분석 및 정보경제학이라는 경제학의 새로운
분야를 여는 계기를 제공하여 경제학을 크게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데 공헌
하였다.
1960년대에는 정부의 규제정책을 실증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에 몰두하였으며
특히 독점의 폐해가 생각보다 큰 것이 아님을 보여 경제학자와 일반인이
지녔던 독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불식시키는데 공헌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관심이 정치행위의 영역으로 확대되어 정치활동 역시
그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합리적인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이는데 성공하였다.
1982년에 노벨상을 받은 스티글러는 시카고 대학시절 만난 연인 마가렛 맥과
결혼하여 슬하에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애들이 어렸을 때는 물론 장성하여
손자 손녀를 본 이후에도 매년 카나다의 한적한 호숫가에 자리잡은 초막에
모여 3대가 여름을 같이 보낼 정도로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으며 1970년
그때까지 해로하던 부인이 작고한 것도 온 가족인 모인 그 초막에서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