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 < 서울대교수. 종교학 >

얼마 전에 새로 입주가 시작된 아파트 단지의 모습을 아직 지울 수 없다.

새로 이사 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짐을 들여놓느라 고가 사다리와
승강기가 쉴 틈이 없었다.

사람과 짐과 이삿짐 트럭들이 한데 엉켜 단지는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 북새통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이 있었다.

멀쩡한 문짝들, 유리를 깨트린 문틀들, 한번도 쓰지 않은 변기들, 반짝
거리는 새 설거지통과 그 받침대들, 그리고 조명기구와 벽이나 바닥의 타일
조각들, 장판과 바닥에 깔았던 것들, 찢어 뜯어 낸 벽지들.

사람들의 표정도 다양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아예 망연자실하는 사람, 부러움으로 바라보는 사람,
분노를 느끼는 사람.

그리고 집을 그렇게 뜯어내고 새롭게 꾸며 바꾸는 사람들의 태도도 마찬
가지로 다양했다.

의기양양한 사람, 편리하고 아름답기를 바라 애써 꾸민다는 사람, 도대체
공사가 날림이어서 그저 들어가서는 살 수 없다고 분노하는 사람.

이제 그 북새통은 옛날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있지도 않고 되삭이려 하지도 않는 듯 하다.

모두 같은 단지 안에서 사는 정다운 이웃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문에서 실직자의 수가 백만 단위로 오르내리는 보도를 볼 때면,
파업의 소식이 들리고,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의 자조적인 탄식을 들을 때면,
그 때 그 모습이 새삼스러워진다.

그리고 지나면서 들었던 일하던 분들의 대화가 다시 들린다.

한 사람이 무슨 물건인지 만지면서 "이것은 버리기 아깝네"하고 말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받아 말하는 것이었다.

"돈 지랄이지...잔소리 말고 버려! 이 일도 없으면 뭐 먹고살려고 그래"

사람들 씀씀이가 늘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가 회복되고 있는 조짐이라고 하는 보도도 들린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어서 경제가 회복되어 하지 못한 일도 하고, 허리띠도 좀 풀고, 자존심도
드높이고, 제법 꿈다운 꿈을 꾸면서 미래도 설계했으면 좋겠다.

찌들고 시든 표정들이 어서 가시고, 아빠 힘내세요라든가 감동을 쥐어짜면서
이웃 사랑을 가르치는 텔레비죤의 프로그램들도 좀 줄었으면 좋겠다.

오래간 만에 연구실에 찾아온 젊은 친구가 어쩐 일이냐고 묻는 인사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잘렸어요"하는 말도 이제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경제가 훨씬 나아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불안하다.

소비의 증가가 경기가 회복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경기회복의 중요한
동인이라고 설명하는 듯한 논리가 자못 마음을 편하지 않게 한다.

경제에 무식한 소치로 참으로 무지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일 터이지만
이 불편함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아니, 비록 소비가 경기회복의 결과라 할지라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을
듯 하다.

도대체 씀씀이 늘음이 어떻게 해서 기릴만한 가치로 전제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회의가 불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삶의 지혜란 구두쇠처럼 막무가내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쓸데
쓰고 쓰지 않을 데 쓰지 않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의 씀씀이 늘음에 대해서도 거품 소비라는 비판적인 인식이
일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어쩐지 그러한 조심스러움보다는 이러한 현상이 다행스럽다는 함축이
이러한 사실을 보도하는 내용들에 더 무겁게 담겨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와 아울러 이른바 가진 사람들의 사치스러운 소비조차 당연하고 필요한
행위로 간주되는 분위기조차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있는 사람들이 자기네 돈 가지고 무슨 짓을 하든 왜 상관이야.
그 사람들이 그렇게라도 돈을 풀지 않으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려고..."
하는 발언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듣는다.

벌되 성실하고 정직하게 벌고, 쓰되 알뜰하게 아끼면서 존절히 써야 한다는
덕목은 이제 오늘의 현실에서는 철저하게 무의미한 것일까.

쓸 데 쓰고, 안쓸 데 안쓰는 소비의 도덕을 그저 돈이란 돌아야 하니까
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당위로 침묵시켜도 되는 것일까.

그럴 수 없다.

있는 사람의 자성과 없는 사람의 자존에 기반한 소비의 도덕이 새삼 아쉽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