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대기업의 은행소유를 허용할 수 없다"고 발언한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그는 11일 "산업이 금융을 지배하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고 주인이 없어서 은행 경영이 안된다는 주장은 허구"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 발언은 금융개혁과 함께 소유제한에
대한 금기도 깨질 것이라고 기대해왔던 기업들에는 적지아니 실망스런
일이다.

사실 은행 소유구조 문제는 그동안에도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던 결코 간단
치 않은 주제의 하나다. 대기업의 은행소유를 허용할 경우 자칫 경제력
집중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급변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이런 주장이 언제까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당장 목전에 진행되는 일들만 봐도 그럴 것이다. 제일은행은 뉴브리지라는
이름도 생소한 미국계 투자펀드에 매각되는 절차를 밟고 있고 서울은행은
국적도 불투명한 홍콩상하이은행(HSBC)으로 팔려가고 있다. 내국인 지분한도
를 4%에 묶어놓은채 진행되고 있는 은행지분 매각 과정은 내국인에 대한
분명한 역차별에 다름 아니다.

사실 금융산업의 대개혁이 필요했던 것은 은행의 부실과 무책임경영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실을 줄이고 책임경영을 확보하자는데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를 구분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굳이 외자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차별해야할 근거도 없다.

"일본을 제외하고는 금융과 산업이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도 근거가
희박하다. 독일은 주요 상장기업의 절대지분이 코메르츠방크 드레스너방크
도이치방크 등 3대은행과 상호주 형태로 보유되고 있을 정도로 산업과 금융이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미국에서도 지난 1934년 제정된 글래스 스티걸(Glass-Steagall)법을 개정할
정도로 산업의 금융화와 금융의 겸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씨티
은행과 트레블러스가 합병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은행과 제2금융을 구분하는
일도 더이상 무의미해지고 있다. 금감원 자신만 하더라도 유니버설 뱅킹
추세에 부응한다는 명분으로 통합된 것임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은행과 제2금융, 그리고 산업자본의 분리
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복잡한 현대 금융현상에 접근하려는 금감위의 편의주의
적 발상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게 되는 것이다. 돌아보면 정부가 진작에라도
은행 지분 제한을 텄더라면 지금쯤은 독립 금융자본들이 오히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금감위원장은 은행 주주들과 직원들,
그리고 경영진이 공동으로 책임지는 시스템을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공동의
책임은 곧 무책임이요 관치에 불과했다"는 엄연한 경험이야말로 문제의 본질
이라는 것을 새삼 지적해두고자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