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순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jisoon@snu.ac.kr >

"그것은 무엇인가(What is it)라는 물음과 그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What should it be)라는 물음을 혼동하는 데에서 너무나 많은 틀린 이론과
그릇된 정책이 나온다. 우리가 "What should it be" 라는 규범적인 물음에
대해 초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먼저 해야 할 것은 "What is it"이라는
실증적 물음에 대한 답을 충실하게 구하는 일이다"

- 프리드만의 "실증경제학에 관한 에세이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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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사람들이 학문에 임함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가치관에 비추어 진실을 왜곡해서 인식하는
오류다.

물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게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다.

우선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 자체가 탐구자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고
관찰자가 지닌 인식의 틀 역시 그의 가치관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증적 물음과 규범적 물음을 구분해서 이해하는
태도로 배움에 임한다면 그 둘을 혼동함으로써 생기는 혼란과 낭비적인
논쟁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프리드만은 철저하게 실증적 입장에서 경제이론을 탐구하였다.

즉, 실증적 명제를 세우고 그것을 입증하는데 온 학문적 열정을 쏟아
부었다.

여기서 실증적 명제란 실제 자료에 근거해 그것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가설을 뜻한다.

또 규범적 명제란 사실에 근거하여 그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는 주장을
뜻한다.

예컨대 "모름지기 우리는 누구나 다 부모에게 효도하여야 한다"라는 주장은
규범적 명제이며, "미리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보다는 죽음에 임해서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이 자식들로부터 더 많이 효도를 받을 수 있는 길이다"라는
주장은 실증적 명제다.

후자는 실제 자료를 조사해 보아 그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으나, 전자의
경우에는 아무리 많은 자료를 동원해도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별할 수가
없다.

다만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 거기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을 뿐이다.

정책에 관한 토론에서는 실증적 물음과 규범적 물음을 구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처음부터 그것이 가치관에 관한 논쟁인지 아니면 사실 여부에 관한 논쟁인지
를 분명히 한다면 어느 것을 토론의 주제로 하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의 구분이 모호하여 참석자들이 각자의 가치관을 합리화시키고자
제멋대로 사실을 뜯어 맞추기 시작한다면 그러한 토론에서 얻는 정책적 결론
은 유용한 것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대로 시행되었을 때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재벌체제에 관한 논쟁을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어떤 논객이 있어 "나는 재벌체제를 싫어한다.

따라서 재벌을 해체시켜야 한다"라고 솔직하게 주장한다면 듣는 이의
가치판단에 따라 그의 주장에 동조하던지 반대하던지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재벌의 국민 경제적 유용성은 애써 무시한 채 재벌이 갖는
문제점만을 열거한 다음 그것을 근거로 해서 재벌을 해체하자고 주장한다면
이는 정직하지 않은 태도이다.

장점이 있다면 그러한 점도 아울러 밝혀야 듣는 이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본인이 주장하는 바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해서 있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감추려 한다면 그게 바로 곡학아세하는 자세라 하겠다.

요즘 우리 나라의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진행되는 토론들을 살펴보면,
그것들이 대부분 규범적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누구도 상대방을
진심으로 설득시키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히며 끝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실증적인 명제를 토론의 주제로 삼지 않은 까닭에 장시간의 토론이
무위로 끝나는 경우에 해당된다.

더욱 희극적인 것은 본인의 가치관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사실만을
그럴듯하게 꿰어 맞추어 변설을 늘어놓는 사람이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가치 중립적인 주장을 펴는 사람을 누르고 논쟁의 승자로 군림하는 현상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