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생명공학 노하우의 혼돈 .. 이동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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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호 < 가톨릭대 교수.신부 >
일년전에 복제양 돌리의 탄생과 붉은 털 원숭이의 복제에 대한 외신보도가
있었다.
지난 12월에는 경희의료원 김승보 교수팀의 업적이라면서 순수연구의 목적
으로 인간 배자를 복제했다가 폐기했단다.
복제소 영롱이도 탄생했다.
서울대 황우석 교수가 행한 수천번 실험의 결실이란다.
인공임신기술을 의료선진국에 수출하고, 식량증산과 부족한 장기공급 그리고
유전병치료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단다.
나는 자연과학기술 종사자들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두려움이 우리 사회를 감싼다.
생명과학의 축복일 듯 싶은데 그 불안감의 원인은 어디서 올까.
과학기술문명과 함께 짚어야 할 것은 첫째, 그것의 목적이 분명 사람의
복지라는 점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공동선의 조건들인데, 이것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생명권이다.
이것의 첫시작은 남녀의 인격적인 결합의 결과로써 자연스런 방법으로
탄생할 천부인권을 확보하는 길이다.
자연스러움속에 인간의 품위가 보장된다.
둘째는, 자기 원의가 있든 없든 실험을 위한 수단이나 재료로 사용될 수
없는 인간 존재라는 가치이다.
인간은 개별부품들의 집합이나 물건이 아니다.
핵치환방식의 체세포복제이든, 수정란분할방식의 배아세포복제이든, 유전자
조작이든 우리가 이성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정신과 육체가 결합된
전체성으로서의 인간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판매된 정자와 난자, 실험용 수정란, 임대된 자궁등은 전체성으로
서의 인간 인격을 일회용쯤으로 격하 또는 축소시킬 수 있다.
셋째로는 인간 각자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기 의미의 확보와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미래적 존재라는 점이다.
사람은 단 한마리를 얻기 위해 수천번 씩의 희생을 치루어도 괜찮은 짐승이
아니다.
유일회적이고 반복되지 않는 인생이다.
사춘기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인한 출생도, 축복받지 못한 사생아도, 평생
장애자도, 유전병자도, 생산성이 없는 노인들도 각자가 완성해야 할 자기
충만의 과제가 있다.
남이 함부로 자기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독립된 가치의 존재이다.
결국 생명은 자기의 것이 아닌 주어진 것이며, 인간이 인간에 대해 생사
여탈권자가 아닌 관리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에게 봉사해야 할 생명공학의 노하우(know how, 기술지)가 과장되어
노왔(know what, 목적지)과 노와이(know why, 이유지)에 대한 성찰을
박탈했다.
인간이 수단이 되었다.
박탈된 천부인권의 주인공이 나일 수 있다는 데 우리 두려움의 원인이 있다.
반항 한번 제대로 해 볼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보호장치도 없다는 현실
인식과 함께, 생명이 생명답게 취급되지 못해 온 우리네 경험이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인간의 정자의 숫자 단위를 마리로 불러 바퀴벌레 취급하고, 인간의
수정란을 볍씨처럼 배아라고 부른다.
양이나 송아지를 사람처럼 돌리니 영롱이니 불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
고, 낙태를 인공임신중절 등으로 불러 죽어가는 피해자의 고통과 가해자들의
도덕적 죄의식을 덮어 버린다.
세계최고수준의 교통사고율, 세계최고의 낙태실천률, 세계최고수준의 인공
수정기술은 넘지말았어야 할 한계선 밖의 우리네 생명의 현주소이다.
남이 내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나도 남에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윤리도덕에서 황금률이다.
과장된 학문적 성취욕과 상업주의 그리고 의료자원의 불평등한 분배 상황은
인간 삶의 질에서 빈익빈 부익부를 가중시킨다.
이식용 장기의 배양기술도, 슈퍼젖소의 복제도, 유전자합성기술도 반갑지
않다.
더욱 두려운 것은 우생학이란 이름으로 선택된 유전형질 하나로 종을 균일화
하려는 시도가 한때 지구를 지배하다 멸망한 공룡들의 운명으로 가는 전주곡
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연적인 리듬을 돕고 보충하는 기본 조처는 정당하고 의무적인 행위이지만,
자연적인 리듬을 깨거나 인간 행위를 대체시키는 특수 조처는 윤리적인 정당
성을 상실한다.
생명공학에서 노하우의 혼돈(chaos)을 반성하고 또 성찰해야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27일자 ).
일년전에 복제양 돌리의 탄생과 붉은 털 원숭이의 복제에 대한 외신보도가
있었다.
지난 12월에는 경희의료원 김승보 교수팀의 업적이라면서 순수연구의 목적
으로 인간 배자를 복제했다가 폐기했단다.
복제소 영롱이도 탄생했다.
서울대 황우석 교수가 행한 수천번 실험의 결실이란다.
인공임신기술을 의료선진국에 수출하고, 식량증산과 부족한 장기공급 그리고
유전병치료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단다.
나는 자연과학기술 종사자들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두려움이 우리 사회를 감싼다.
생명과학의 축복일 듯 싶은데 그 불안감의 원인은 어디서 올까.
과학기술문명과 함께 짚어야 할 것은 첫째, 그것의 목적이 분명 사람의
복지라는 점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공동선의 조건들인데, 이것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생명권이다.
이것의 첫시작은 남녀의 인격적인 결합의 결과로써 자연스런 방법으로
탄생할 천부인권을 확보하는 길이다.
자연스러움속에 인간의 품위가 보장된다.
둘째는, 자기 원의가 있든 없든 실험을 위한 수단이나 재료로 사용될 수
없는 인간 존재라는 가치이다.
인간은 개별부품들의 집합이나 물건이 아니다.
핵치환방식의 체세포복제이든, 수정란분할방식의 배아세포복제이든, 유전자
조작이든 우리가 이성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정신과 육체가 결합된
전체성으로서의 인간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판매된 정자와 난자, 실험용 수정란, 임대된 자궁등은 전체성으로
서의 인간 인격을 일회용쯤으로 격하 또는 축소시킬 수 있다.
셋째로는 인간 각자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기 의미의 확보와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미래적 존재라는 점이다.
사람은 단 한마리를 얻기 위해 수천번 씩의 희생을 치루어도 괜찮은 짐승이
아니다.
유일회적이고 반복되지 않는 인생이다.
사춘기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인한 출생도, 축복받지 못한 사생아도, 평생
장애자도, 유전병자도, 생산성이 없는 노인들도 각자가 완성해야 할 자기
충만의 과제가 있다.
남이 함부로 자기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독립된 가치의 존재이다.
결국 생명은 자기의 것이 아닌 주어진 것이며, 인간이 인간에 대해 생사
여탈권자가 아닌 관리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에게 봉사해야 할 생명공학의 노하우(know how, 기술지)가 과장되어
노왔(know what, 목적지)과 노와이(know why, 이유지)에 대한 성찰을
박탈했다.
인간이 수단이 되었다.
박탈된 천부인권의 주인공이 나일 수 있다는 데 우리 두려움의 원인이 있다.
반항 한번 제대로 해 볼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보호장치도 없다는 현실
인식과 함께, 생명이 생명답게 취급되지 못해 온 우리네 경험이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인간의 정자의 숫자 단위를 마리로 불러 바퀴벌레 취급하고, 인간의
수정란을 볍씨처럼 배아라고 부른다.
양이나 송아지를 사람처럼 돌리니 영롱이니 불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
고, 낙태를 인공임신중절 등으로 불러 죽어가는 피해자의 고통과 가해자들의
도덕적 죄의식을 덮어 버린다.
세계최고수준의 교통사고율, 세계최고의 낙태실천률, 세계최고수준의 인공
수정기술은 넘지말았어야 할 한계선 밖의 우리네 생명의 현주소이다.
남이 내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나도 남에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윤리도덕에서 황금률이다.
과장된 학문적 성취욕과 상업주의 그리고 의료자원의 불평등한 분배 상황은
인간 삶의 질에서 빈익빈 부익부를 가중시킨다.
이식용 장기의 배양기술도, 슈퍼젖소의 복제도, 유전자합성기술도 반갑지
않다.
더욱 두려운 것은 우생학이란 이름으로 선택된 유전형질 하나로 종을 균일화
하려는 시도가 한때 지구를 지배하다 멸망한 공룡들의 운명으로 가는 전주곡
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연적인 리듬을 돕고 보충하는 기본 조처는 정당하고 의무적인 행위이지만,
자연적인 리듬을 깨거나 인간 행위를 대체시키는 특수 조처는 윤리적인 정당
성을 상실한다.
생명공학에서 노하우의 혼돈(chaos)을 반성하고 또 성찰해야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