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승희 < 한국경제연구원장 >

경제학에 있어서 가장 풀기 어려운 난제중의 하나가 경제운영에 있어서의
정부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론"에서부터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경제적 역할에 대한 주의.주장은 물론 실제 경험에 있어서 그 차이는
너무나도 크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구조조정에 있어서의 정부의 역할이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 1년간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 과정을 돌이켜 보면, 그동안은
외환위기의 극복과 IMF프로그램의 조속한 집행등 시각을 다투는 정책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속에서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금융.기업의 구조
조정에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이 주류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경제위기의 구조적 원인이 정부의 지나친 관치경제로 인해 자율경쟁
과 책임의 시장경제원리가 작동하지 못한데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그동안
경제의 모든 곳을 받쳐온 정부의 막강한 뒷받침과 간섭을 없애는 것이 무엇
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억지를 버리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라는 무위자연의 철학을 설파한 노자의
"도덕경"에는 정부의 경제적 역할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경구들이
발견된다.

"천하는 억지로 취하고자 하는 자는, 결국 그것을 얻지 못할 뿐이다.
천하는 신령한 기물이라, 억지로 할 수가 없으니, 억지를 부리는 자(위자)는
실패할 것이요, 잡는 자는 이를 놓칠 것이다. 무릇 사물에는, 앞서가는 것도
있고 뒤따르는 것도 있으며, 들여마시는 것도 있고 내뿜는 것도 있으며,
강한 것도 있고 여린 것도 있으며, 싣는 것도 있고 떨어뜨리는 것도 있다.
이때문에 성인은 극심함을 버리고, 지나침을 버리고, 과분함을 버린다"
(도덕경 29장, 무위편)

이 경구는 노자가 "무위"의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대로 경제운영에도 적용될 수 있다.

경제를 운영함에 있어서 경제주체들을 억압으로 길들이려 한다면 이는
경제왜곡의 길을 스스로 취하는 것이다.

사물은 전부 성질이 다르며 인간의 본성도 각기 다르다.

경제계란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것은 인간의 인위적 조작을 초월해 있다.

그러므로 경제는 단순히 억압과 강제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다스리고자 하면 실패할 것이고, 강제적으로 이를 잡고자
한다면 놓치게 될 것이다.

무릇 경제내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다양하고 가지각색이다.

어떤 것은 남보다 앞서 먼저 가지만, 남의 뒤를 따라가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굳세고 강하지만, 어떤 것은 취약하다.

어떤 때는 안정되고 순탄하지만, 어떤때는 험난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제현상의 다양하고 복잡한 모습을 아는 사려깊은 정부는 항상
무위자연의 철학에 따라 경제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르며 결코 인위나 조작에
의해 억지로 경제를 꾸미지도 않고 강제적으로 하려 하지도 않는다.

또한 정도와 한계를 벗어난 과분한 개입을 하지 않는다.

경제란 정부와 같은 국외자가 금융기관과 기업의 훌륭한 모습을 "디자인"해
놓고, 자 이제부터 자율경쟁과 책임의 원칙하에 굴러가거라 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의 변화과정은 꾸준한 그리고 간단없는, 자생적인 진화과정이다.

구조조정이 추구하는 목적이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그 추진방식이 이러한
경제의 본질적 특성을 헤아리고 국민들의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원인치유 방식보다도 명분이나 형식에 치우치게 되면, 자칫 압력이나 강제력
에 의해 경제를 디자인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형식적으로는 구조조정을 다 해놓고도 경제의 실질은
바꾸지 못하여 부실이 재연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정부의 대민간 보호막이 두껍고 개입의 정도가 깊은 경제는
그만큼 시장경제 발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노자의 무위자연의 철학은 시장경제질서의 작동원리를 설파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부의 경제적 역할에 대한 철학적 기초를 제시하고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