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길 < 고려대 석좌교수 (전 UN 대사) >

21세기에 있어서 유엔의 역할과 위상을 어떻게 재정립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광범한 토의가 진행중에 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금차 유엔총회 개막 연설에서 글로벌라이제이션
(Globalization) 과정이 초래할 효과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엔의 역할 강화를
강조하면서 2000년의 유엔 총회를 "천년 총회(Millennium Assembly)"로 명명
하고 회원국의 정상회담도 제안하여 현재 그 준비에 분망하고 있다.

지난 89년 냉전체제가 붕괴된 후 유엔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는 풍선처럼
커졌다.

이러한 기대속에서 유엔은 캄보디아 보스니아 앙골라 등 지역에서 일어난
분쟁을 수습하기 위해 유엔 평화유지군을 보내는 등 그 역할을 크게 넓혀
왔다.

특히 이러한 유엔의 역할은 전 독재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제도 정착을
위한 선거의 조직과 감시, 인도에 반한 범죄를 처벌키 위한 전범 재판소의
설치 운영, 인권 침해에 대한 규탄 등 종래에는 국내 사항으로 간주되던 영역
으로까지 대폭 확대되었다.

그러나 유엔의 이러한 역할 확대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많은 난관과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유엔에서 이데올로기 대립은 사라졌지만 선.후진국간의 경제문제를 둘러싼
대립, 강대국의 권력 정치, 예민한 주권문제 등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유엔은 두 갈래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있다.

첫째는 국제사회가 유엔에 대한 기대와 요구를 축소하고 현재의 여건과
재원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제한적인 기능만을 수행케하는 것이다.

둘째는 증가하는 국제적 수요에 부응하여 유엔의 권능과 역할을 확대하고
재정적 기반을 개선해 주는 길이라 하겠다.

오늘날 국가나 인간안보에 대한 위협이 군사적 성격을 넘어 빈곤 핵확산
환경오염 등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되고 있다.

또 글로벌라이제이션 현상이 국가간의 상호의존과 협력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는 현실에서 볼 때 우리의 선택은 후자일 수밖에 없다.

유엔에 보다 확대된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주권 등 기본 문제에 대한
회원국들의 전향적 입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적 문제가 확대일로에 있고 21세기에는 이러한 추세가 더욱
강해져 국제사회의 공동대처가 불가피해질 것이므로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한
주권 "제약"은 오히려 주권의 확대 행사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야 할 것이다.

유엔은 현재 여러 분야에서 많은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안보리의 확대개편과 재정문제의 해결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특히 안보리가 민주적으로 개편되어 유엔의 대표성을 높일 것인지 또는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을 더 증가시켜 민주적 국제조류에 역행할 것인지의
여부는 유엔의 장래를 가름하고 우리 국익에도 큰 영향을 주는 중요한
문제다.

또 한가지 중요 문제는 유엔이 안정적이고 건전한 재정기반을 갖지 않고는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유엔의 전체 예산이 연간 12억달러 내외인데 현재 한나라의 누적 연체비가
물경 10억달러에 달했다는 사실은 유엔의 재정위기를 단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유엔이 회원국으로부터 독립된 세수를 갖고 재원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회원국들의 의무로 되어있는 분담금의 정상적
납부는 물론, 보다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재원확보의 메커니즘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정부수립에서부터 한국전쟁, 전후 복구, 경제 건설에 이르기까지
유엔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유엔가입은 냉전이 종식된 2년
후인 91년에야 이루어졌다.

그러나 1년전까지 세계평화유지에 주된 책임을 지고 있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으로 활동하고 평화유지군에 동참하는 등 제반 유엔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앞으로 통일 한국을 내다보면서 보다 확대된 국제적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자
하는 한국으로서는 21세기에 대비하기 위한 유엔의 역할 강화에 더욱 의미
있는 기여를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후의 세계를 전망해보면 주권국가와 유엔의 관계에
있어서 의미있는 변화가 있을 수 있고 또 세계문제 해결을 위한 유엔의 권능
도 더욱 확대되어 갈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