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 소설가 / 경제평론가 >

한 천년이 끝나는 해인지라, 1999년은 우리로 하여금 모처럼 긴 세월을
생각하도록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천년을 다루는 일은 흔하지 않다.

사회의 모든 조직들이 연간 예산으로 운영되는 터라, 우리의 시평
(time-horizon)은 대개 한 해를 넘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평의 한계는 자신의 삶이 끝날 때다.

몇 십년에 지나지 않는 그 세월 너머는 빈 그림이다.

몇 백만년을 진화해온 인류에게 천년은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백년을
못사는 개인에겐 천년은 실감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그래서 그런 시간대의 시평을 얻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그것은 여러모로 흥미롭고 유익한 지적 활동이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대로 999년의 세상을 살펴보면 이 점이 또렷이 드러
난다.

10세기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1000년의 제야에 이 세상이 끝나고 최후의
심판이 닥치리라는 종말론을 굳게 믿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평상시와는 다르게 행동했다.

사람들은 기도를 열심히 하고 교회에 열심히 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자선을 베풀었고 다른 사람들은 떼를 지어 부자들과 대금
업자들을 죽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포기해 사회가 상당히 궁핍해졌다.

이런 행동들은 광기가 어린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상황에선 합리적이었다

비정상적인 때엔 비정상적 행동들이 합리적이다.

이 세상이 곧 끝난다면, 이 세상이 영속하리라는 가정 아래서 합리적이었던
행동을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다.

우리 시대에도 물론 종말론은 있다.

천문학자들은 말한다.

이 우주는 대폭발(Big Bang)로 생겨나 영원히 팽창하든지, 아니면 몇 백억
년 뒤에 다시 줄어들기 시작해 대수축(Big Crunch)으로 멸망하리라고.

어느 경우든 이 우주를 이룬 물질들까지 모두 없어질 것이다.

생명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종말론은 10세기 기독교인들이 믿었던 종말론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극적이고, 살아날 사람들이 없다는 뜻에서 절망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대해 거의 마음을 쓰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Y2K 문제"다.

어째서 우리는 크고 중요한 문제인 종말론 대신 그렇게 일상적인 문제에
매달릴까.

물론 가장 큰 까닭은 우주의 멸망은 몇 백억년 뒤의 일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상상하기도 벅찰 만큼 긴 세월이다.

게다가 우리가 그것에 대비할 길도 전혀 없다.

기도도 효과가 없고, 과학도 대책을 내놓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우주의 운명에 마음을 쓰지 않고 일상의 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우리로선 합리적인 행동이다.

사람들은 늘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999년에도 그러했고 1999년에도 그러하다.

천년 사이에 달라진 것은 사람들이 지닌 지식과 정보다.

그렇게 달라진 지식과 정보가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다.

불행하게도 지식의 축적과 문명의 발전은 새로운 문제들을 낳는다.

우리가 지닌 지식과 힘이 커질수록 우리가 우리 앞날에 대해 품은 불안도
함께 커진다.

핵무기와 환경파괴 같은 큰 문제들에 이제는 유전공학의 오용 가능성까지
더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최후의 심판을 마련한다는 악몽에 시달린다.

영국의 시인 W B 예이츠가 "재림"(The Second Coming)에서 보여준 무서운
전망은 갈수록 생생해진다.

"어떤 사나운 짐승이, 드디어 제 시간을 만나, 태어나려고 베들레헴을 향해
구부정한 모습으로 걸어가는가"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모두 보기 좋고 마음 든든해지는 것들은 아니
지만, 모처럼 시평을 늘려 문명의 뜻과 인류의 미래와 같은 문제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의 움츠러든 마음을 펴준다.

그리고 지금 거대한 절벽처럼 우리의 눈길을 막고 선 경제적 어려움을
잠시나마 제 크기로 줄여준다.

우리 세대만 누리는 이 기회를 그냥 보낸다면 얼마나 아까운가.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