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새해를 열며...나누는 삶과 문화 .. 정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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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조 < 동국대 부총장 >
우리는 지금 20세기를 마감하며,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초에 서 있다.
영겁을 흐르는 시간의 윤회속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점이다.
지난 세기까지 인류를 지배해 온 것은 "힘의 논리"였다.
끊임없는 살육과 대립으로 지구촌은 북적였다.
중세까지는 그 명분이 주로 정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고 있었다.
끝없는 땅따먹기 놀음끝에 대국과 약소국의 차별은 심화되어 갔다.
과학문명의 발달을 앞세운 서양세력의 동점은 금세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동서냉전이 종식되면서 양상은 조금씩 바뀌어 간다.
즉 경제를 앞세운 침탈현상이 또다른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총칼이 돈으로 바뀌었을뿐, 그 밑바닥을 흐르는 것은
여전히 "힘"의 질서이다.
미래학자들은 21세기를 "문화의 시대"로 조심스럽게 규정한다.
문화라는 말은 퍽 점잖아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들의 모든 삶의 몸짓이다.
글 노래 춤 그림 여가선용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문화는 특정환경의 소산일 뿐 아니라, 그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그렇다면 한국문화의 알맹이는 무엇일까.
나는 불교와 유교 등의 정신적 가치가 그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 전통적 종교문화는 우리 한민족의 삶속에 용해되었으며 한국적 사고의
뿌리가 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 전통종교는 새로운 세기를 열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기
에는 역부족인듯 보인다.
왜냐하면 전통의 무게에만 안주할뿐, 새로운 도전에 대하여 둔감하기 때문
이다.
더구나 지난해 말에 야기되었던 조계종 사태는 온 국민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세속을 계도해야 할 불교가 오히려 세속을 향해 도움과 심판을 요구하는
비극이 연출된 것이다.
종교와 사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둘이 밀착하면 반드시 타락된 모습들이 나타난다.
A 토인비는 이와같은 현상을 "종교의 세속화"라고 부른다.
반면 이 둘이 대립하면 또 피의 복수가 이어진다.
왜냐하면 종교적 가치는 절대기준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사회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서로를 견제하는 이른바 "긴장관계"
유지가 가장 바람직하다.
사회는 종교의 충고에 귀기울여야 하며, 종교는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청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세계화의 관건은 모든 전통종교의 재해석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단순히 불경을 영어로 옮기고 도심속으로 포교당이 진출한다고 하여 대중화
현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문제를 이들 전통가치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조명하는 작업
들이 선행돼야 한다.
안락사의 문제, 인간복제실험, 유전자 조작, 대규모 살상무기의 제조,
환경파괴 등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대안과 논리를 제시해야만 한다.
깨진 토기조각을 치켜들고 세계제일이라고 외친다거나, 무너진 주춧돌
사이에서 동양최대를 말하는 것은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문화의 역사가 길다는 것은 자랑할만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에 적용시킬 수 없다면, 그 의미는 반감되고 말 뿐이다.
인간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비록 오늘의 현실이 고달프더라도 언젠가는 밝은 때가 있으려니 하는 희망
속에 산다.
조계종총무원이 백마고지처럼 뺏고 뺏기는 전투장이 될때 많은 국민들의
가슴속에 있던 그 "희망의 꿈"도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
여전히 대다수의 국민들은 청정한 승가를 꿈꾸고 있다.
이제 조계종이 해야 할 일은 "화합"이외에는 방도가 없다.
원효대사의 절규는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다.
"나의 죄를 구제 못하는데, 어찌 남을 건질 수 있으리오?"
선종에서는 대사일번이라는 말을 쓴다.
"크게 죽어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이제 조계종 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은 그와 같은 각오로 국민앞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
문화의 세기는 곧 "만남"을 의미한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아름다운 수도의 경험들을 나누는 행위가 바로
문화적 태도이다.
새해에는 "남을 배제하는 종교의 일반적 정서"가 보다 보편화되기를 기대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5일자 ).
우리는 지금 20세기를 마감하며,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초에 서 있다.
영겁을 흐르는 시간의 윤회속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점이다.
지난 세기까지 인류를 지배해 온 것은 "힘의 논리"였다.
끊임없는 살육과 대립으로 지구촌은 북적였다.
중세까지는 그 명분이 주로 정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고 있었다.
끝없는 땅따먹기 놀음끝에 대국과 약소국의 차별은 심화되어 갔다.
과학문명의 발달을 앞세운 서양세력의 동점은 금세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동서냉전이 종식되면서 양상은 조금씩 바뀌어 간다.
즉 경제를 앞세운 침탈현상이 또다른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총칼이 돈으로 바뀌었을뿐, 그 밑바닥을 흐르는 것은
여전히 "힘"의 질서이다.
미래학자들은 21세기를 "문화의 시대"로 조심스럽게 규정한다.
문화라는 말은 퍽 점잖아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들의 모든 삶의 몸짓이다.
글 노래 춤 그림 여가선용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문화는 특정환경의 소산일 뿐 아니라, 그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그렇다면 한국문화의 알맹이는 무엇일까.
나는 불교와 유교 등의 정신적 가치가 그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 전통적 종교문화는 우리 한민족의 삶속에 용해되었으며 한국적 사고의
뿌리가 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 전통종교는 새로운 세기를 열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기
에는 역부족인듯 보인다.
왜냐하면 전통의 무게에만 안주할뿐, 새로운 도전에 대하여 둔감하기 때문
이다.
더구나 지난해 말에 야기되었던 조계종 사태는 온 국민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세속을 계도해야 할 불교가 오히려 세속을 향해 도움과 심판을 요구하는
비극이 연출된 것이다.
종교와 사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둘이 밀착하면 반드시 타락된 모습들이 나타난다.
A 토인비는 이와같은 현상을 "종교의 세속화"라고 부른다.
반면 이 둘이 대립하면 또 피의 복수가 이어진다.
왜냐하면 종교적 가치는 절대기준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사회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서로를 견제하는 이른바 "긴장관계"
유지가 가장 바람직하다.
사회는 종교의 충고에 귀기울여야 하며, 종교는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청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세계화의 관건은 모든 전통종교의 재해석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단순히 불경을 영어로 옮기고 도심속으로 포교당이 진출한다고 하여 대중화
현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문제를 이들 전통가치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조명하는 작업
들이 선행돼야 한다.
안락사의 문제, 인간복제실험, 유전자 조작, 대규모 살상무기의 제조,
환경파괴 등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대안과 논리를 제시해야만 한다.
깨진 토기조각을 치켜들고 세계제일이라고 외친다거나, 무너진 주춧돌
사이에서 동양최대를 말하는 것은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문화의 역사가 길다는 것은 자랑할만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에 적용시킬 수 없다면, 그 의미는 반감되고 말 뿐이다.
인간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비록 오늘의 현실이 고달프더라도 언젠가는 밝은 때가 있으려니 하는 희망
속에 산다.
조계종총무원이 백마고지처럼 뺏고 뺏기는 전투장이 될때 많은 국민들의
가슴속에 있던 그 "희망의 꿈"도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
여전히 대다수의 국민들은 청정한 승가를 꿈꾸고 있다.
이제 조계종이 해야 할 일은 "화합"이외에는 방도가 없다.
원효대사의 절규는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다.
"나의 죄를 구제 못하는데, 어찌 남을 건질 수 있으리오?"
선종에서는 대사일번이라는 말을 쓴다.
"크게 죽어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이제 조계종 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은 그와 같은 각오로 국민앞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
문화의 세기는 곧 "만남"을 의미한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아름다운 수도의 경험들을 나누는 행위가 바로
문화적 태도이다.
새해에는 "남을 배제하는 종교의 일반적 정서"가 보다 보편화되기를 기대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