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덕연구단지에 근무하는 한 연구원으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으나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라는 말을 핑계삼아
곧 한국을 떠날 계획이라는 그는 과학자들의 자조적 표현인 "김포공항의
기적"에 대해 얘기했다.

외국의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어렵게 습득한 전문지식이 김포에 들어오면서
사라지고 다시 같은 공항을 통해 외국에 나가면 되살아 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소리없이 무너지고 있는 한국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울분은 "관료주의적
한국 과학기술 정책"에 직격탄을 날렸다.

한마디로 "가학기술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과학기술의 실패는 정책의 무능 탓이었지 과학자의 무능
때문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이라는게 깜짝쇼처럼 제시되고 대부분 비전문가
장관이 임명되는데다 그것도 1년도 안돼 바뀌면서 취임때마다 저마다 원대한
국가과학기술정책을 내놓는 것들이 모두 한국과학기술을 망쳐 왔다고 비판
했다.

단적인 예로 그는 G-7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2조원이나 쏟아부은
국가주도 연구개발사업을 들어 여태 무슨 성과를 거두었는지 의문이라고
반문했다.

한국 과학기술의 본산이라는 대덕 연구단지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올들어 1천명이 넘는 연구원들이 연구소를 떠났다.

기술개발투자가 줄어 중단되는 연구프로젝트가 속출하고 기업부설 연구소도
잇따라 문을 닫고 있다.

의욕을 잃은 연구원들은 이제 더 이상 연구실의 불을 밤새 밝히지 않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의 중심에 있는 과학기술부는 지금 아예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연구의 자율성을 확보한다는 명분아래 산하 출연연구소 관리를 국무총리실로
이관시킨다는 행정체계 개편법안이 이미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과기부의 존립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연구소들은 옥상옥으로 또 하나의 시어머니를 모시게 됐고.

문제는 관리체계를 그렇게 바꾼다고 연구의 자율성이 유지된다고 믿는
연구원들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게 한국 과학기술의 현실이다.

이제 혼란과 시련의 1년이 지났다.

IMF 관리체제 1년동안 우리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가.

나라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줄잡아 2백만명의 실업자가 생기고 소득은
반토막났다.

한국사회를 지탱해온 중산층이 붕괴되고 가정이 해체되면서 갈곳 없어진
노숙자들은 추운 날씨에 아직도 서울역 지하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동안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신화를 떠받쳐 왔던 "아시아적 가치"는 몰락
했다.

그 자리를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라는 이름이 최고선으로
대신했다.

지난 1년의 혼란, 그것은 따지고 보면 동.서양 문명과 가치의 충돌이
가져온 패러다임(Paradigm)의 일대전환인 것이다.

IMF는 우리에게 그러한 패러다임의 변혁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란 사물과 현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시각의 변화요,
기준의 변화를 의미한다.

토머스 쿤이 지난 62년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처음 명제로
내걸었던 패러다임이란 용어의 정의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쿤은 "패러다임의 변화는 과학기술의 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진부한 패러다임의 의미를 되짚는 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혁의 근간은
과학의 혁명이며 기술혁신을 통해 패러다임의 전환을 완성할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과학기술이 갖는 의미를 새롭게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철학의 문제인 것이다.

과학기술은 국가발전의 인프라이다.

남들이 따라 할수 없는 기술, 그것이야말로 글로벌 스탠다드이다.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에 그런 철학이 진실로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런 바탕에서 과학기술정책이 새로 짜여지지 않는다면 정말 한국의 미래는
없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대통령 링컨의 얘기를 덧붙이자.

그는 노예해방의 영웅이었지만 발명가이기도 했다.

미국특허 6469호-화물선이 쉽게 얕은 강바닥을 통과하게 하는 기술이
그의 특허였다.

그는 미국 각주에 공과대학을 하나씩 설립해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고의
기술대국으로 올라 설수 있게한 공로자였다.

지금 미국의 힘이 어디에서 왔는지 보여주는 것일수 있다.

추창근 < 정보통신부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