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태경제협력체(APEC)가 또 하나의 경제블록이 될까.

지난 89년 출범한 이후 APEC의 블록화 가능성의 여부는 심심찮게 거론돼
왔다.

APEC이 추구하는 바가 장기적으로 역내 무역과 투자자유화를 통해
동아시아와 미주를 잇는 "경제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APEC은 역내 무역을 활성화시키고 인력, 기술, 관광, 통신 등의
분야에서 회원국간 협력을 증진한다는 중단기 목표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90년대들어 세계 각지에서 블록화 경향이 가속화됨에 따라 일각에서는
APEC이 조만간 하나의 경제블록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곤
했다.

지난 96년 필리핀 수비크항에서 열린 제4차 APEC 정상회의에서
아.태 경제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무역 및 투자 자유화의 구체적 실행계획
이 합의되자 이를 경제블록화의 첫단추로 여기는 견해도 있었다.

만약 이 견해대로 APEC이 블록화될 경우 인구면에서는 전세계의 52%,
국내총생산(GDP)에서는 63%,교역면에서는 48%를 점유하는 거대블록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APEC이 유럽연합(EU)과 같은 경제블록이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무엇보다도 APEC은 "개방적 지역주의(open regionalism)"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방적 지역주의란 역내 경제협력 증진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동시에
역외국가에 대해서도 역내국가와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입장이다.

다시말해 비배타적, 비차별적 원칙에 의한 지역협력을 추구함으로써
세계무역기구(WTO)의 자유무역정신에 부합되는 다자체제를 확대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APEC을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나 EU 등의 다른 지역주의와 구별짓는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개방적 지역주의의 정신은 94년에 나온 APEC의 제2차 EPG(저명인사그룹)
보고서에 잘 나타나있다.

EPG는 이 보고서에서 APEC 회원국들은 <>역내국가에 대해 가능한한
최대한의 시장개방조치를 실시하되 <>역외국에 대한 무역장벽도 지속적으로
완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개별국가가 역내 자유화조치의 혜택을 역외국에 대해서도 상호주의에
입각해 적용할 수 있다는 원칙도 제시했다.

개방적 지역주의 원칙을 통해 APEC은 범세계적 무역 자유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일례로 WTO의 정보기술협정(ITA)은 APEC이 역내에서 합의한 사항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APEC은 또 전자상거래 등의 새로운 통상 이슈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같은 원칙의 측면외에도 APEC이 경제블록을 형성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애로요인들이 있다.

우선 회원국간 경제력의 격차가 너무 크다.

블록을 형성하려면 회원국들의 경제수준이 어느정도 엇비슷해야 한다.

그러나 APEC에는 미국 일본 등 세계 최고의 선진국들과 중국 베트남 필리핀
파푸아뉴기니 등 1인당 국민소득이 1천달러도 채 안되는 후진국들도
들어있다.

더군다나 아시아 위기 이후로는 회원국간의 경제력 격차가 더욱 벌어져
블록화는커녕 기존에 합의된 무역 및 투자 자유화 계획의 이행마저
어려워지고 있다.

실제로 최근 태국정부는 무역 및 투자자유화 계획 이행을 유보할 뜻을
밝힌바 있다.

또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이번 콸라룸푸르회의에서는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논의하지 말자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밖에 회원국들의 문화적 차이도 경제블록 형성에 걸림돌이다.

EU나 중남미 경제공동체인 메르코수르처럼 경제블록은 회원국간 문화적
동질성이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APEC회원국들 사이에는 언어 종교 등에서 큰 장벽이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APEC이 추구하는 경제공동체는 기존의 경제블록과는 다른
성격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아.태 경제공동체는 EU식의 완전한 경제통합이나 배타적 경제블록이
아닌 동양의 대가족제도식 공동체가 돼야한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이 금융위기를 겪는 아시아 국가들을 위해 3백억달러의 기금을
내놓겠다고 한 제안도 이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