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정권 초기의 경제정책 ]

61년 5월18일 장면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제2공화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5.16이후 1주일쯤 지나 케네디 미 대통령이 쿠데타를 기정 사실화하자
쿠데타 주체들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정치면에서는 개략적이나마 사전 준비를 한 듯 했지만 경제쪽으론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이들은 쿠테타 직후 우선 헌법을 정지시키고 3권을 쥔 최고회의를 설치했다.

특히 모든 정보를 관할하고 수사력까지 갖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것을 보면
집권준비는 상당히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건설은 군인들에게 너무나 생소했다.

한마디로 오리무중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일부 혈기찬 청년장교들은 혁신계의 주장에 휩쓸려 "부정축재자"들을
총살하라고까지 하면서 살기 등등했다.

군사정부의 경제정책은 쿠데타 이후에야 급조됐다.

군인들은 우선 민주당 정부의 정책재료를 닥치는 대로 수집하고 분석했다.

쿠데타 준비 과정에서 새 헌법 초안 마련 등 주도역할을 했다는 이석재씨
(최고위원 및 감사원장 역임)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장면정부가 작성한
5개년경제계획 자료 조차도 얻을 수 없었다"고 푸념했다.

60년 12월에 제출된 종합경제회의 건의내용을 겨우 구해 교본처럼 샅샅이
검토할 수 있었다고 했다.

쿠데타 주체들은 그래서 "모든 과거는 부정한다"는 쿠데타의 특성에 역행해
제2공화국의 경제정책들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

5월18일 쿠데타 세력들은 장면 내각의 핵심사업인 국토건설사업은 중단없이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25일엔 농어촌고리채 정리계획을 공포했다.

27일 부흥부를 건설부로 개칭하고 5개년 계획 작성업무를 종합계획국으로
이관했다.

28일엔 부정축재자처리 기본요강을 발표하고 소위 부정축재자 24명을 긴급
구속했다.

준비가 좀 있었다지만 정치쪽엔 문제가 적지 않았다.

초기부터 쿠데타 주체들 간에 암투가 심했다.

당시 내가 속해있던 산업개발위원회는 신설된 최고회의 기획위원회에 흡수
됐다.

나도 이 위원회의 예산 재정담당 전문위원이 됐다.

6월초 어느날 중앙청에서 열린 각의에 참석했다.

안건은 예산 관련 심의였다.

그런데 회의 벽두 난데없이 장도영 수반(당시 장도영은 최고회의 의장 내각
수반, 국방장관, 참모총장을 겸임)이 케네디 대통령을 면담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박병권 중장(후에 국방장관)이 긴급질의를 하겠다며 "어떻게 내각수반의
미국방문이 사전에 아무 협의도 없이 불쑥 언론에 보도될 수 있는가"고 큰
소리를 쳤다.

그는 일어서서 장도영 수반에게 삿대질을 하는양 거친 어조로 따졌다.

박 중장의 언행에서는 국가 최고권력자에 대한 예의나 품의를 존중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각의 직후 장도영의 도미계획은 취소됐다.

아마 쿠데타 주체가 아닌 사람으로 장도영의 실각을 제일 먼저 감지한 것은
나였을 지도 모른다.

경제면에서는 더욱 암중모색이었다.

경제건설은 맡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유원식 상공담당 최고위원이었다.

유씨는 5.16부터 62년 6월10일 통화개혁까지 1년 이상 한국 경제를 실질적
으로 좌지우지한 사람이다.

그래서 유씨의 회고록(박정희 장군과 유원식 "정경문화" 83.9~10)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회고록을 인용할 때는 주의할 점이 적지 않다.

자기변명과 합리화 가능성에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우선 그 속에 들어가 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회고록의 한 대목을 풀어보자.

5.16 당일 오후 장도영 총장이 처음으로 군사혁명위원회를 대표해서 기자
회견을 했다.

장도영이 유원식을 바라보며 물었다.

"국체를 무어라고 대답하면 좋겠소" 유원식은 "입헌민주공화국이라고
하시오"고 말했다.

"경제체제에 대해서는"(장도영) "자유주의 경제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계획
경제를 하겠다고 하시오"(유원식)

5월20일께 유원식은 박정희에게 "모든 권력과 지위 명예는 박장군이 차지
하시고 경제는 내게 맡겨주시요"라고 말했다.

그는 회고록에 "자립경제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고 생각했다"고 기록해놓았다.

불타는 정열, 어린애같은 치기 그리고 마구잡이에 가까운 경제운영 구상을
갖고 있던 유씨가 휘두른 정책으로 군사정부의 경제는 표류할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자세히 소개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마음이 급했다.

6월 하순 박정희는 유원식 최고위원에게 대표적 기입들과의 만남을 주선할
것을 지시했다.

천우사 전택보, 경방 김용완, 강원산업 정인욱 사장 세 사람이 최고회의에
나타났다.

6월29일에는 일본서 갓 귀국해 반연금 상태였던 삼성 이병철 사장이 메트로
호텔에서 박정희를 만났다.

이런 일련의 만남을 통해 박정희는 기업인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당시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을 만났어도 속시원한 해답을 못얻었던 그였다.

그러나 기업인들은 한국경제발전의 방향과 전략을 뚜렷이 제시했던 것이다.

과거부정의 사관을 가졌던 박정희는 경제만은 과거의 인물들에게서 배워야
겠다는 자세를 갖게 됐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