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암 오르내리는 길엔 벌써 가을 수확이 한창이다.

이 곳 고령산 자체가 잡목이 많고 그 잡목중에서도 보광사에서 수구암
사이에는 참나무가 많다.

그 참나무에서 상수리가 익어 떨어지고 있다.

다람쥐 몇마리가 매우 열심히 굴밤을 주워 나른다.

지난 여름 그 엄청난 수해를 입은 후 나는 거처를 큰절에서 수구암으로
옮겼다.

같은 산중이지만 수구암은 큰절 보광사에 비교해 깊은 산사의 적막한 맛이
있다.

앞으로 수구암도 식구가 더 늘어날 것이겠지만 아직은 나 혼자다.

혼자있다.

낮에도 혼자있고, 밤에도 혼자있다.

큰절하고 먼 거리가 아니라 공양은 큰절에 내려가 먹지만, 그저 혼자 있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혼자서 도토리 떨어지는 길을 걸어서 오르내리고 혼자서 마루 끝에 앉아
해지는 석양도 바라본다.

혼자서 이 가을 풀벌레 소리를 듣고, 새 소리를 듣는다.

참 오랜만에 혼자가 된 듯하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던가.

적막한 시간의 맛이 강하게 내 몸으로 스며들어 오는 것만 같다.

수해로 집이 떠내려 가는 바람에 소중하게 아껴야 할 물건도 없어졌다.

내 스스로 그런 잡동사니 물건들을 차마 버리지 못했는데, 수마가 그것을
모두 가져갔다.

그렇게 떠내려 보내고 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듯 하다.

몸이 가벼워졌다.

가진 것, 잡동사니가 없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누가 말하길 "많이 버리면 많이 얻는다"고 했다 한다.

전체를 통으로 버리면 또 얻는 것도 통으로 얻는다던가.

이렇게 홀가분한 기분으로 거처를 수구암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렇게 귀중한 혼자가 된 것이다.

이곳 수구암은 그 이름이 입을 지킨다는 뜻의 수구암이다.

따라서 나는 입을 지키고, 귀는 열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내 거처의
당호는 지음당으로 정할 생각이다.

곧 편액도 직접 써서 걸려고 한다.

혼자 있으면 이야기 할 대상이 없으니 자연 입을 지키게(수구)된다.

그리고 자연히 주변의 여러가지 소리를 귀기울여 듣게 된다.

아니 귓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주변의 작은 풀꽃 하나에서부터, 벌레 하나에까지 그 소리와 그 사는 양을
관심있게 관찰해 보아야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일에 벽을 쌓고 살 생각은 아니다.

때론 인간사도 한발 멀리서 보아야 잘 보일 때가 있다.

그동안 내 자신이 해오던 여러 가지 일들, 그런 것들도 새롭게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요즘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미국 대통령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일도 그렇고,
아버지가 아들의 손가락을 잘랐다고 하는 일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뒤집어 생각할 여유도 생긴다.

"사람이 한 뭉치의 흙을 던지면 개는 흙뭉치를 따라가 물지만, 사자는
사람을 문다"고 한 말처럼 세상일도 뒤집어 볼 여유 같은 것이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해 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그 아버지를 통해 나는 새롭게 인간을
보고 우리사회를 보는 것이다.

지식인의 잣대로 여론을 만들고 대중을 교육하고 있다.

한데 그런 사람들이 극한 상황의 가난으로 몰려 보았을까.

앞길이 보이지 않는 절망 말이다.

거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바 없어 지적사고에 능력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아들의 손가락을 잘랐다.

나는 자꾸 그 사람이 내 손가락을 자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 사람이 "너는 어찌 가난한 이웃을 잊고 있느냐"하고 달려들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절대로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는 사람들은 나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소리가 이곳 지음당으로 들리는 듯 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