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에는 산소 줄을 달고 팔에는 투석 줄, 무릎에는 컴퓨터 줄을 늘어뜨린
채 병상에 앉아 소설을 쓰는 여자.

2년째 신장투석을 받으면서도 "병이 난 이후부터 그렇게 행복할수가
없다"며 말갛게 웃는 마흔 두살의 노처녀 작가.

소설가 박정요씨가 등단 9년만에 장편 ''어른도 길을 잃는다''(창작과비평사)
를 내놓았다.

8남매가 북적거리는 딸부잣집의 11살자리 소녀를 통해 가부장적 사회와
좌우대립의 틈바구니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어른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은 해남 땅끝마을에서 정월 대보름날 마당에 불을 피워놓고 그 위를
나이수만큼 뛰어넘는 액막이 장면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행남이는 천덕꾸러기 "가시낭년"으로 태어나 어머니의 지청구에
시달리며 곤궁한 성장기를 보낸다.

그의 눈에 비친 토속적인 풍속화와 정감어린 유년의 물감들이 작품 전체를
흥건하게 적신다.

아들만 감싸는 풍토에서 자매들이 겪는 애환, 능란한 처세로 근현대사의
격랑을 헤치고 가족을 건사한 할머니, 이념대결의 와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아버지의 행보도 녹록지 않게 그려진다.

특히 남도의 걸쭉한 사투리와 해학, "덕석" "해찰" "잿등" "보름밥"등
잊혀진 우리 말의 묘미가 작품을 더욱 살갑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동학혁명 실패로 땅끝까지 밀려온 구한말 사람들과 한국전쟁,
산업화 과정의 아픈 이야기도 농익은 문법에 담겨있다.

이 작품이 나오자 그의 병실을 자주 찾았던 동료작가 김형경씨는 "그가
소설을 완성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래 담금질된 쇳덩이가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연상했다"며 "격동과 암흑의 세계를 헤쳐온 민중의 삶을 한
아이의 시각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에는 담백한 동양화가 지닌 설화적인
분위기가 돋보인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임규찬씨도 "들 넓어 하늘은 나무 부근에 나직하다는 옛 시구를
실감케 하는 좋은 작가의 좋은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