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칼라가 몰락하고 있다.

구조조정과 맞물린 대량 해고로 사무실에서 땀을 흘려야 할 이들이 엉뚱한
곳에서 방황하고 있다.

취업설명회장을 기웃거리거나 뒤늦게 고시촌에서 끙끙대고 있는 전직
대기업체 임직원들.

그들의 모습은 우리시대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샐러리 맨의 죽음"은 단순히 희곡제목이 아니라 너무나도 분명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6월 국내 굴지의 전자업체 부장직을 희망퇴직한 40대 중반의 P씨.

그는 지금도 넥타이까지 갖춰 맨 정장차림으로 매일 아침 집을 나선다.

그의 새 출근지는 서울 종로에 있는 한 유명 고시학원.

법대 출신의 전공을 살려 법무사 자격증을 따겠다며 늦깎이 수험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협력업체로 "낙하산"이라도 탈 수 있었을 텐데 요즈음은
그것도 여의치 않더라구요.

내년이면 아들놈이 대학에 진학하는데 어디 놀 수 있습니까".

그는 그러나 책을 손에 놓은지가 너무 오래돼 단박에 붙을 자신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1월 증권사를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던 30대 후반의 또다른 P씨는
신림동 고시원에서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중이다.

그에 따르면 IMF사태 이후 직장을 그만두고 뒤늦게 신림동 고시촌에 뛰어든
사람이 10~20%늘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단기 승부가 가능한 법무사, 주택관리사, 감정평가사 등
자격증 시험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고등 실직자들이 자격증 취득에 몰리다 보니 이에 편승한 신종사기까지
판치고 있다.

최근 실직한 K씨는 한 고시학원으로부터 물류관리사 자격증 취득을 권유받고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를 알려줘 피해를 당했다.

학원측은 교재를 집으로 배달하고 물품대금은 주민등록번호로 찾아낸
신용카드로 결제해 버린 것.

재취업 교육이 열리는 곳은 어디든 "만원"이다.

서울대 증권경영연구소가 지난 4월 실직자 재교육을 위해 마련한 2개월짜리
"단기금융과정"에는 매기마다 3~4대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전직 종금사 대표에서부터 부도난 증권사 대리에 이르기까지 좌절의
쓰라림을 맛본 화이트 칼라들이 재기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또 능률협회, 생산성본부 등 컨설팅 기관에서 마련한 노무관리, 정보검색,
외환관리 등 전문 직종과 벤처, 소호(SOHO) 등 창업강좌에도 수강생이
쇄도하고 있다.

그러나 쏟아 내기만 할 뿐 받아들일 엄두를 전혀 못내고 있는 기업들의
현 인력구조에서는 재취업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을 줄 지는
미지수다.

현직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마음놓고 직장일에 충실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보통신 업계에 근무하는 입사 6년차의 C대리.

그는 요즈음 외근을 핑계대며 이따금씩 헤드헌팅 업체 사무실을 찾는다.

"직장 동료 하나가 헤드헌팅 업체를 통해 보수도 좋고 근무 시스템도 잘
갖춰진 외국계 회사에 재취업했는데 부럽더군요.

지금 직장에서는 계속해서 감원 얘기가 나오는데 제가 알아서 제 살길을
마련해 놔야 하지 않겠어요"

평생직장은 없고 평생고용만 남은 시대.

대량 해고 바람에 떨고 있는 직장인들은 고용시장에 자신을 내놓아 언제라도
기회가 오면 자리를 옮기려는 것이다.

요즈음 헤드헌팅 시장에는 이같은 자발적인 "이적"신청이 몰려들고 있다.

IMF직후에는 도시 직장인들의 농촌행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직장 생활에 염증을 느낀 농촌 출신 직장인들이 축산이나 원예사업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해 보겠다는 취지에서다.

IMF직후인 지난 1월 농림부와 각 시.도 농촌지도소에 설치된 귀농상담실에는
평소 3배가 넘은 귀농상담이 접수됐다.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넥타이 부대"의 처절한 붕괴는 새로운
개념의 샐러리 맨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골드 칼라"가 그것이다.

금처럼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높은 가치를 창조하는 인재라는 뜻이다.

화이트 칼라가 학력과 경력을 중심으로 사무능력과 행정능력을 발휘하는
관리자라면 골드 칼라는 적성분야에서 자발적 열정과 창의력으로 높은
성과를 내는 것을 중요시 한다.

윤은기 국제기업전략연구소장은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취업인구의 절반인
1천2백만명이 화이트칼라로 새롭게 형성되는 기업환경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화이트 칼라들의 골드칼라로의 변신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윤 소장이 제시하는 골드칼라의 특징은 평생직장이 아니라 평생직업을
중시하고 승진에 연연하지 않고 성취감을 즐기며 업적평가에 따른 보상체계를
선호하는 것 등이다.

사상 최대 격변기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화이트 칼라들.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안정된 직장인"이었던 은행원은 이제
정리해고 "0순위"로 전락하고 말았다.

수출한국의 역군으로 우리 경제발전의 상징있던 대기업체 직원들도
미혼여성들의 배우자 직업 선호도에서 최하위권으로 밀려나고 있다.

그러나 좌절할 수 만은 없다.

거역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몰락의 시대"에도 활로는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의 시대는 시련의 시대이자 한편으론 도전의 시대이기도
하다.

< 윤성민 기자 smyo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