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난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 ]

조동성 < 서울대교수/경영학>


흔히 경제학은 비관적인 학문(blue science)으로, 경영학은 낙관적인
학문(rosy science)으로 대비한다.

그래서인지 경영학도인 필자는 지난 20여년간 한국경제를 전망하면서 미래에
대해 어두운 평가를 해 본적이 한번도 없다.

그런데 올해 하반기에 대해서만은 밝은 전망을 할 근거가 보이지 않아
우울해진다.

정부의 정책담당자나 학자들은 비관론의 근거로 국제금융시장 불안과
자금난, 그리고 수출감소 현상을 든다.

그러나 필자가 걱정하는 것은 경제가 어려운 국면으로 돌입하고 있다는
물리적인 상황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관적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경제가 나빠지는 속도에 비해 정부
기업, 그리고 국민들이 실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이에 대비하는 속도가
늦다는 점이다.

수치로는 실업자가 1백50만명을 돌파해 7%대의 실업률이라고 하지만
전문가들은 문을 닫은 자영업자, 빈사상태에 빠진 중소기업들을 포함할 때
이미 실업자가 3백만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제 워크아웃 프로그램을 기다리고 있는 대기업그룹들이 본격적으로
인력구조조정을 시작하면 실업률 20%는 초읽기 상태로 들어갈 것이다.

한국경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아직 정부와 대기업그룹, 그리고
근로자들은 서로 상대를 불신하면서 반목과 사보타지를 일삼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한 한국경제의 미래에는 희망의 싹이 움틀 수 없다.

우리는 한국경제를 다시 살려내야 한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쓸 수있는 대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제위기로 인해서 나타난 높은 실업률, 막대한 외채부담 등의
증상을 없애주는 단기적인 대증요법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증상을
근본적으로 해소해주는 근치요법이다.

높은 실업률을 회피하는 대증요법으로는 근무시간 단축, 임금삭감 등 질적
고용조정을 들 수 있다.

반면 근치요법을 쓴다면 과감한 정리해고로 기업.정부 등 경제관련조직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퇴출한 실직자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교육과
창업지원 등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외채부담을 경감하기 위해서는 해외기업의 국내투자와 한국기업의
수출증대를 고려할 수 있다.

해외기업의 국내투자에 대해서도 대증요법으로는 국내기업을 저평가하여
싼 값으로 매각하는 것이고 근치요법으로는 국내시장의 잠재력과 국내기업의
수익가치를 높여 해외투자가들로 하여금 한국의 미래에 대해 투자하게 하는
것이다.

수출증대에도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수출기업에게 국가의 모든 지원을 제공하는 대증요법이고 다른
하나는 수출기업이 먼저 경쟁력을 갖추도록 도와주고 수출기업들이 경쟁력에
입각해 수출을 촉진하도록 하는 근치요법이다.

전자를 택한다면 수출증대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외국에서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정부가 수출촉진을 위한 각종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근로자는 열악한 근무조건을 감내하고 희생하며 소비자는 설령 품질이 낮고
가격이 비싸더라도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

그러나 후자를 택한다면 정부가 택하는 수출진작정책은 우리나라 기업이
경쟁력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근로자와 소비자들도 한국경제가 선진화하는 방향으로 힘을 합쳐야 한다.

때로는 자극을 주기 위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노사 협상도 해야 하고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하기도 해야 한다.

어느 길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가장 큰 변화를 보이게 될 것은 기업, 특히
대기업그룹의 구조조정 여부다.

대기업그룹은 정부 산업정책의 산물이다.

정부는 제한된 자원을 전략산업에 집중투자하는 방법으로 대기업그룹을
육성했고 이들에 국내시장에 대한 독과점적 지위를 허용했으며 높은 부채
비율을 지탱할 수 있는 신용을 제공해주었다.

또 전자 자동차 반도체 정보통신 등 신규 전략산업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자본동원능력과 우수한 인재 풀을 가진 대기업그룹을 활용, 이들의
사업다각화를 조장했다.

대기업그룹의 다각화전략과 부채의존전략은 정부지원에 입각한 수출촉진에는
이바지했지만 홀로서기를 전제로 하는 경쟁력 강화에는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경제가 대증요법을 선택한다면 대기업은 구조조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동안의 다각화전략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수출품목을 개발하고
종합상사를 활용해 수출시장을 확대해야 한다.

5대 대기업그룹 계열사에 대한 무역금융은 허용해야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집중 지원해야 한다.

반면에 한국경제가 경쟁력강화를 통한 근치요법을 선택한다면 대기업은
구조조정을 통해 전문화된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5대 대기업그룹 계열사에 대한 무역금융도 구조조정이 끝난 기업에 대해서만
허용한다면 구조조정 일정을 단축하는 효과가 생긴다.

이러한 선구조조정-후수출지원이라는 수순은 5대 대기업그룹 이하의 대기업
그룹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한국경제는 대증요법보다 근치요법을 선택해야 한다.

실업자들을 궁극적으로 도와주는 방법은 임시변통적인 취업이나 실업수당에
의존케하는 것보다 비록 일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경험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떳떳한 근로기회를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외국기업의 국내기업 인수에 대해서도 싼 값으로 이들을 유혹할 것이 아니라
이들이 국내시장에 참여해 국민생활의 향상에 이바지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투자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수출도 수출지원보다는 경쟁력을 통해 장기적으로 해외시장을 확대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제정책의 담당자는 현실의 상황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과 함께 정책의
우선순위를 적절하게 선택해야 한다.

한국경제의 선결과제는 역시 대기업그룹의 구조조정이다.

현재 5대 대기업그룹의 구조조정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대기업그룹의 경영권을 가진 오너들이 계열사에 대한 경영권을
유지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은 경쟁력강화를 추구하는 후자의 정책보다 수출육성을 강조하는
전자의 정책을 선호한다.

그리고 수출촉진과 함께 현재 진행중인 기아자동차 입찰 사례에서 보듯
대기업을 앞세워서 특정 산업을 육성하는 기존 산업정책을 정부에 종용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대기업그룹, 특히 5대 그룹이 구조조정을 필연의 과제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분명한 신호(시그널)를 보내야한다.

즉 대기업그룹을 통해 특정 산업을 육성해온 기존 산업정책을 포기하고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는 경제 하부구조에 대해서만 참여한다는 정책의지를
구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가 정보시스템의 구축,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등 정부투자가
필요한 내용과 함께 독과점적 시장구조의 개선, 부당내부거래 근절, 기업
투명성 제고를 위한 사외이사제도, 소액주주의 권리 강화, 경영자의 경영
책임 추구 등 경제활동에 대한 원칙의 확립과 기업흡수합병(M&A)시장의
활성화,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에 대한 차등이자 적용 등 시장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정부는 이러한 시장경제적 메커니즘을 도입하되 각 대기업이 추구해야 할
구조조정의 내용에까지 간섭해서는 안된다.

정부는 각기업의 고충을 이해하고 이들이 구조조정을 추구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요인들을 제거해 주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부의 정책의지가 뚜렷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구조조정에
앞장서는 기업이 커다란 수확을 얻을 수 있도록 시장경제체제를 갖추어주면
대기업그룹들은 스스로를 위해 능동적으로 구조조정에 임할 것이다.

대증요법은 쉽고 근치요법은 어렵다.

그렇다고 대증요법에만 의존할 경우 한국경제는 선진권으로 도약할 수 없다.

한국국민은 근면하고 교육열이 높다.

이런 국민이 있는 한 한국경제는 건강하다.

이번 기회야말로 우리가 과거의 잘못된 부분을 치유하고 건강하게 다시
태어날 절호의 기회다.

정부가 기업의 구조조정을 통해 단기처방보다 근본을 치유하는 목적을
추구하되 정확한 형세판단과 적절한 우선순위에 따라 합리적으로 정책을
펴나간다면, 그리고 대기업그룹이 정부의 경제정책 산업정책 대기업정책이
변했다는 상황인식을 분명히 해 구조조정을 적극적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한국경제의 경쟁력 강화와 시장경제체제의 수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