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전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단순한 "아껴쓰기"에서 "효율적 이용"으로 절전의 포인트가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전기절약이 덕목으로 꼽혔다면 이제는 적정소비가 아름다워 보이는
시대다.

한국전력도 더이상 종전과 같은 절전 캠페인은 벌이지 않는다.

"전력피크 최고치 경신"이나 "전력수급 빨간불" 등의 표현들이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다.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절전은 제안이 아닌 의무로 다가서는 개념이었다.

그랬는데 불과 1년만에 상황이 돌변했다.

"절전과 적정소비" 사이에서 어쩔줄 몰라하는 심리적 부조화 현상도
사라졌다.

적정 소비쪽으로 절전운동의 무게중심이 옮아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때로는 소비가 미덕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전력수요가 워낙 쪼그라든 상태라 설비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선 제대로 된
소비가 필요하다.

전력공급 능력과 최대전력 수요를 대비해 보면 이같은 관점은 명확해진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최대전력 수요는 지칠줄 모르고 몸채를 키워 왔다.

96년 3천만kW를 훌쩍 뛰어넘어 97년엔 3천5백만kW를 초과했다.

정부와 한국전력은 깜짝 놀라 공급능력 확충책을 서둘러 마련했다.

우리나라의 발전설비 용량은 지난해 3천8백만kW까지 늘어났다.

문제는 설비용량이 최대로 늘어난 시점에서 급격한 수요위축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한전은 올들어 전력소비가 야금야금 줄어들자 석유화력 LNG복합 등의
발전소를 무더기로 가동 중단시켰다.

비용절감 차원에서 어쩔수없이 취해진 조치다.

전력은 저장이 곤란한 에너지다.

수요가 줄었는데도 공급규모를 이전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낭비다.

가동 중단에도 불구하고 전력공급이 가능한 여유분인 공급예비율은 올해
최대전력이 기록된 7월8일 기준으로 8.9%를 나타냈다.

이는 지난 93년의 10.4%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결국 전력설비 효율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올해 전력수요를 급격히 위축시킨 일차적 배경은 산업용전력의 수요감소에
있다.

산업용 수요는 전체 전력소비의 무려 57%를 차지한다.

IMF사태는 자금난을 심화시키면서 연쇄부도와 생산감축을 가져 왔다.

산업용 전력수요도 급격히 감소할 수 밖에.

올 상반기 산업부문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할 때 무려 5.5%나 감소했다.

게다가 게릴라성 폭우를 뿌리는 악천후까지 겹쳐 가정의 전력 소비도 뚝
떨어졌다.

한전 입장에선 전력소비가 줄 경우 투자재원을 마련할 길이 막히게 된다.

장기적인 경제여건등을 감안해 전력수급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발전소를
건립하는 메카니즘을 발동하기 곤란하다는 얘기다.

한전은 발전소 건설 마련키 위해 유휴전력 수요 개발에 나섰다.

전력피크를 대비해 발전했다가 수요가 뒷받침되지 못하고 낭비되는 전력을
팔겠다는 구상이다.

전력요금에 시장기능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은 수요개발 노력에 다름 아니다.

많이 쓴 사람에게 혜택을 주겠다는 점에서 그렇다.

심야전력 소비를 유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낮과 밤의 전력수요 격차를 줄임으로써 발전설비의 효율성을 높이자는
포석인 것이다.

최근 축랭설비를 갖추려는 업무용 빌딩에 대해 자금지원을 대폭 늘린 것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하면 쉽게 해석된다.

지금은 IMF 한파로 전력소비가 크게 줄어 설비가 남아 돌지만 경기가
살아나면 언제 또 전력부족현상이 발생할지 모른다.

한전으로서는 늘 최대전력 수요를 감안해 발전소를 건설한다.

때문에 최대전력 수요와 최소전력수요간 격차가 크면 낭비요인을 그만큼
커진다.

전력의 효율적 이용이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절전 패러다임이 착근하려면 소비자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절제되지 못한 수요가 발생할 때엔 수요격차의 골이 깊어지게 마련이다.

이러면 에너지 자원이 낭비될 소지는 커질 수 밖에 없다.

에너지는 수입의존도가 무척 높다.

합리적 전력소비는 간접적인 외화가득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외자유치가 절체절명의 과제인 시기인 만큼 전력소비의 구조도 조정돼야
한다.

< 박기호 기자 khpark@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