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좋은 시 .. 정진규 <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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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어려우면 모든 것이 위축되기 마련이다.
우리 시에도 그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요즈음 "좋은 시"를 만나기가 좀체 어렵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대중조작의 혐의가 짙은 시집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까지
하다.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가.
이같은 우리 시의 오늘의 징후를 좀더 구체적으로 열고 들어가 보자.
그 가운데 하나가 시의 "평면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서정성의 회복을 새삼스레 내세우고 있는 시들에서
두드러지고 있는데,보다 조밀한 내면의 탐색을 기피하고 단면의 선택에만
머물러 시적 긴장감이 와해되고 있음을 보인다.
이른바 "익명시"들이 표방하고 있는 "사랑타령" 따위가 대중적 호응을
사고 있는데서 온 안일한 편승은 아닐지.
혹은 근간의 많은 젊은 시인들이 산문화, 해체화 경향을 보이고 있음과
그에따른 우회와 굴절의 문장구조를 일삼고 있음에 식상한 무분별한 단순화
현상은 아닐지 걱정이 되는 바 없지 않다.
우리 시의 왜소화, 도식화를 부를 요인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화자 우월성"이다.
현대시의 기본 구조로서의 상징성은 화자와 대상의 일체화에 있음을 모를
까닭이 없을 터인데 근래에 와서 이같은 본질이 기피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언어의 암시성보다 지시성에 더 기대는 안일한 포즈가 노출되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 또한 또다른 평면화 현상이라 할 것이다.
문제는 고뇌의 상실이다.
갈등의 상실이다.
편한 것, 쉬운 것이 전도된 가치가 되어가고 있는 도피적인 삶의 징후가
시를 또한 그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이점 경계해야 할 일이다.
통과제의의 과정이 생략된 삶, 단순 유희의 행복, 그런 쾌락주의에 우리는
늘 유혹을 받고 있지만 시절이 어려운 때일수록 이러한 현상은 우리를 눈멀게
할 수가 있다.
시는, "좋은 시"는 이러한 우리의 삶에 언제나 미학적 순수 제어의 구실을
해왔다.
그래서 시는, 시인은 언제나 고독해왔다.
이제 시도 시인들도 더이상 고독을 감내할 수가 없다는 것인가.
이는 "좋은 시"가 지니는 의의와 그 가치에 대한 최소한의 수용마저
거부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현실에 대한 슬픈 반응이기도 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16일자 ).
우리 시에도 그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요즈음 "좋은 시"를 만나기가 좀체 어렵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대중조작의 혐의가 짙은 시집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까지
하다.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가.
이같은 우리 시의 오늘의 징후를 좀더 구체적으로 열고 들어가 보자.
그 가운데 하나가 시의 "평면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서정성의 회복을 새삼스레 내세우고 있는 시들에서
두드러지고 있는데,보다 조밀한 내면의 탐색을 기피하고 단면의 선택에만
머물러 시적 긴장감이 와해되고 있음을 보인다.
이른바 "익명시"들이 표방하고 있는 "사랑타령" 따위가 대중적 호응을
사고 있는데서 온 안일한 편승은 아닐지.
혹은 근간의 많은 젊은 시인들이 산문화, 해체화 경향을 보이고 있음과
그에따른 우회와 굴절의 문장구조를 일삼고 있음에 식상한 무분별한 단순화
현상은 아닐지 걱정이 되는 바 없지 않다.
우리 시의 왜소화, 도식화를 부를 요인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화자 우월성"이다.
현대시의 기본 구조로서의 상징성은 화자와 대상의 일체화에 있음을 모를
까닭이 없을 터인데 근래에 와서 이같은 본질이 기피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언어의 암시성보다 지시성에 더 기대는 안일한 포즈가 노출되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 또한 또다른 평면화 현상이라 할 것이다.
문제는 고뇌의 상실이다.
갈등의 상실이다.
편한 것, 쉬운 것이 전도된 가치가 되어가고 있는 도피적인 삶의 징후가
시를 또한 그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이점 경계해야 할 일이다.
통과제의의 과정이 생략된 삶, 단순 유희의 행복, 그런 쾌락주의에 우리는
늘 유혹을 받고 있지만 시절이 어려운 때일수록 이러한 현상은 우리를 눈멀게
할 수가 있다.
시는, "좋은 시"는 이러한 우리의 삶에 언제나 미학적 순수 제어의 구실을
해왔다.
그래서 시는, 시인은 언제나 고독해왔다.
이제 시도 시인들도 더이상 고독을 감내할 수가 없다는 것인가.
이는 "좋은 시"가 지니는 의의와 그 가치에 대한 최소한의 수용마저
거부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현실에 대한 슬픈 반응이기도 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