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사회가 부여 예 옥저 등 당시 북방사회와 비견될 만큼 높은 수준의
문화를 지녔으며 해외교류도 활발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국립박물관 공개강좌에서 최근
발표한 논문 "신창동 유적으로 본 삼한의 사회상"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광주광역시 신창동 저습지유적에서 지난해 발견된 유물을 조사한 결과
그동안 "위지동이전" 등 기록상으로 전해오던 삼한(변한 마한 진한)의
사회상을 일부 확인했다고 말했다.

5천여평의 이 유적에서는 목기와 칠기 등 유기물질들과 자연유물들이 대량
출토돼 기원후 1~2세기를 전후해 이지역에 주거지와 공방지 등을 갖춘 사회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것.

이실장은 우선 각 유구에따라 부장품의 질과 수량이 다른만큼 삼한사회에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알수있다고 지적했다.

또 바디 실감개 방추차 등의 유물은 당시 잠상 등의 제조수공업이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목걸이 귀걸이 유리구슬 등 구슬류와 현악기 파편을 통해서는
삼한의 문화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의 동전과 일본의 동과 등 외국유물 등이 발견됨으로써 해외교역이
활발했다는 사실을 알수있다고 그는 밝혔다.

특히 붓등 문방구류가 나와 당시 사회가 문자를 사용하는 높은 문명을
가졌으며 대외교역시 영수증을 작성하기위해 문방구를 활용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도칠목제22지부간두식과 목조등의 유물은 "소도"라고 하는 제사
지역에서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겼다는 문헌기록과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이실장은 결국 삼한은 독자적인 문화및 부족국가형태를 갖추고 있던
사회였으며 이 문화가 한민족문화의 한 원형으로 자리잡게됐다고 주장했다.

< 오춘호 기자 ohcho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