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박세리가 해냈다.

미국 위스콘신주 블랙울프 런 골프코스에서 열린 제53회 US여자오픈
골프대회 우승.

그것은 골프가 아니라 잘 짜여진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그녀의 쾌거는 국가경제 파산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한국인들의 주름진
마음을 잠시나마 펴주었다.

나미스코다이나쇼, 맥도널드 LPGA 챔피언쉽, 두모리에 클래식과 함께 세계
4대 메이저대회중의 하나인 US 여자오픈 골프대회 동양인 사상 첫 우승.

우승 소감을 묻자 박세리는 매우 능숙한 영어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18번 홀에서 나는 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내 포기(give up)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해냈다"

박세리의 우승이 감격스러운 것은 그 악명높은 코스의 US여자오픈골프에서
동양인 최초, 최연소 우승기록을 세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어떤 역경의 순간에도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는 한국인의 내면에
도사린 불굴의 의지를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 불굴의 의지, 자신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야말로 오늘의 한국인이 당면한 위기를 헤쳐나가는 자산임을
그녀는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상금랭킹 선두인 도나 앤드루스, 애니카 소렌스탐, 레셀로테 노이먼, 캐리
웹과 같은 세계적인 선수들조차 악명높은 블랙울프 런 코스 공략에 실패한
채 줄줄이 낙오하고, 결국 남은 것은 만 스무살을 갓 넘긴 두명의 동양선수들
이었다.

미국의 NBC방송 등은 US오픈 사상 처음으로 동양선수끼리 우승결정전을
벌이는 상황을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서 나가던 박세리의 17번홀에서의 통한의 보기퍼팅과 18번홀의 2미터짜리
버디퍼팅의 실패로 다 잡았던 우승을 놓친 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18번홀의 9미터짜리 극적인 버디퍼팅 성공으로 동타를 이룬 동갑내기 태국
이민 2세대 제니 추아시리폰과 한국의 슈퍼 루키 박세리의 대결은 18홀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볼티모어에서 태국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를 둔 추아시리폰은 정확한 아이언
샷, 안정된 퍼팅,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냉정한 플레이를 펼쳤다.

아마츄어 선수로서 세계 4대 메이저대회 우승을 다툴만한 실력을 충분히
갖추었다.

미국 명문 듀크대학 3학년인 추아시리폰이 전반 홀은 앞서갔다.

불안한 출발을 보이며 4타나 뒤져 있던 박세리가 11홀에서 버디퍼팅을
성공시키며 추격을 시작했다.

곧바로 동타를 이룬 두 선수의 18홀까지의 접전은 그야말로 숨막히는
접전이었다.

두 선수는 연장전에서도 한치의 양보도 없이 동타로 마침내 18홀까지 왔다.

박세리의 티샷.

그러나, 믿기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박세리의 공이 몇번 바운드를 하며 연못쪽으로 굴러갔다.

불행중 다행으로 공은 연못에 빠지기 직전 급경사면의 긴풀 위에 위태롭게
걸렸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승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추아시리폰과 그의 캐디로 나선 친오빠의 얼굴에 승리를 확신하는 엷은
미소가 어렸다.

숨을 죽이며 두 선수의 플레이를 지켜보던 갤러리들도 승부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좀처럼 표정의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 믿기지 않을 만큼 침착한
(unflappable) 박세리가 천천히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양말을 벗었을 때 그녀의 발은 너무나 하얗게 빛났다.

물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은 뒤 그녀는 냉정하게 공을 밖으로 쳐내는데
성공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그녀가 보여준 침착성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추아시리폰이 여전히 유리한 고지에 서 있었다.

그러나, 추아시리폰이 쉽게 잡아낼 것같던 버디퍼팅에 실패하고 파퍼팅으로
18번홀을 끝냈다.

다시 박세리에게 기회가 왔다.

박세리도 파퍼팅으로 18홀 연장전을 마쳤다.

두 선수 2오버파 동타.

연장전에서도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승부는 서든데스로 넘어가
마침내 11번홀, 박세리의 퍼팅 차례.

박세리의 퍼팅차례.

버디를 낚기에는 꽤 먼 거리였다.

그린을 신중하게 살피고 방향과 거리를 충분히 읽은 박세리의 공이 직선으로
뻗어나가며 순식간에 홀컵으로 빨려들어갔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갤러리들이 일제히 환성과 박수를 치며 기립했다.

박세리의 플레이를 가슴조이며 지켜보던 그녀의 아버지가 커다란 딸을 번쩍
안아 치켜 들었다.

플레이 내내 그토록 냉정했던 박세리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튼튼한 다리와 아름다운 스윙을 보여준 박세리의 우승.

박세리가 세계여자골프의 역사를 새롭게 쓰며 세계여자골프 박세리시대를
여는 쾌거를 이루어낸 순간이었다.

박세리는 말한다.

"골프의 승부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건 곧 방심과 자만심과의 싸움이라는 뜻이다.

나는 방심은 물론 자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얼마나 대견한가.

박세리의 우승이 감격스러운 것은 그 악명높은 코스의 US여자오픈골프에서
동양인 최초, 최연소로 정상을 정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어떤 역경의 순간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한국인의 내면에
도사린 불굴의 의지를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드러냈다.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 불굴의 의지, 자신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야말로 오늘의 한국인이 당면한 위기를 헤쳐나가는 자산임을
그녀는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현대사회에서 스포츠는 단순히 개인의 갈고 닦은 기량과 체력을 겨룬다는
경지를 넘어선다.

스포츠가 창출해내는 사회적 의미는 그것이 보다 넓고 깊은 의미의
체계속에 높여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것은 분산된 사회적 총생산 역량을 집결시키며, 그것을 자극하고, 사회적
이윤의 극대화를 실현시켜주는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세리는 단순한 스포츠 영웅을 넘어선 이 시대의 영웅이다.

이 스포츠 영웅의 출현에 직접적인 투자와 기여를 했던 한 기업은
스포츠 마케팅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키며 이미 천문학적인 숫자의 광고
효과와 기업이윤 창출이라는 과실을 수확했다.

박세리의 최연소 세계골프여왕 등극은 13세때부터 골프에 입문하여 엄청난
훈련을 묵묵히 감당해내며 이룬 개인적 꿈의 실현이며, 더나아가 실업사태와
경제공황으로 고통하고 신음하는 한국인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 일종의
사회적 카니발이자 씻김굿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