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철 < 광혜병원 정신과 원장 >

사업을 하다 도산한 사람이나 실직한 사람이나 실직당할 위험에 항상
노출돼있는 사람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좌절은 한결같다.

30년간 한가지 제조업에 몸담아 나름대로 기반을 닦아왔던 김 사장이 IMF로
부도를 맞았다.

사업확장을 하다 뜻밖의 돈가뭄에 시달려 공장과 집을 날리게 된것이다.

미국 유학중이던 자녀는 귀국해야 했고 평소 신경쇠약증에 시달리던 아내는
자살했다.

극단적인 경우다.

살아남은 자도 마찬가지다.

괜히 짜증나고 매사에 신경질적으로 대처하고 부정적인 생각만 머리에
맴돈다.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나의 약점과 무능을 꼬집지는 않을지 염려돼서다.

나의 선의를 오해할까 조바심도 생긴다.

이래저래 가장들은 스트레스를 먹기만 하고 배설을 못하니 심신만 잔뜩
긴장된다.

내성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스트레스가 더 크다.

불편한 감정을 하소연해봤자 자존심 상하고 남에게 불편이나 끼칠것 같은
생각이 앞선다.

이런 딜레마의 바탕은 일정한 권리와 지위를 누려왔던 자가 갑자기 지위를
잃게 되면 격앙된 공포와 분노를 느끼게 되는 이른바 "권리소유박탈증후군".

갑자기 자신만이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든다.

스스로를 컴컴한 동굴속에 가두고 남의 비난에 자책하게 된다.

이런게 "IMF 우울증".

누구든 동굴을 빠져 나오는게 쉽지 않을 것이다.

불빛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그 불빛은 누구보다 끝까지 자신을 믿으려는 마음의 자세.

"강제된 무능"을 거부하고 "자기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나서야 한다.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감정을 통제하는 가운데 나름대로 균형을 찾게 돼
있다.

"젠장 썩어빠진 사회, 몹쓸 인간들"을 뇌까리기보다는 삶의 어려움을
아내와 자녀에게 솔직히 털어놓으며 동병상련의 심정을 나누는게 정신적
으로나 교육적으로나 훨씬 낫다.

세상에 열등한 아버지는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청소 장보기 자녀학습지도 이웃과의 대화 등을 통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자.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내멋대로 안되는 세상에서 이런 실천을 통해 새로운 기분이 들게 될 것이다.

열등하다는 것은 결국 하고 싶은 것을 뒤로 미루고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다.

하루를 어떻게 보람차게 지내야 할지 생각하고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에서 IMF 우울증의 절반은 치유될수 있다.

인생이란 어떤 목적을 위해 사는게 아니고 하나의 과정이란 생각이 들때
다소 여유를 찾지 않을까 싶다.

* 564-0768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