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을이 같이 돈을 대 논 몇 마지기를 샀다.

농사는 농부인 을이 짓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뜻하지 않은 태풍이 불어 농사를 망쳐버린 것이다.

이런 경우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갑인가 을인가 아니면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일까.

요즘 자주 오르내리는 말 중에 주식매수청구권이란 것이 있다.

상장기업이 사업부문 양도등 중요결정을 할때 이에 반대하는 소액주주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주식을 사달라고 회사측에 요구할 수있는 권리다.

대주주가 전횡을 부릴 때에 대비해 소액주주를 보호하자는 좋은 취지로
마련된 제도다.

그런데 이 주식매수청구권이 IMF(국제통화기금)체제라는 비상국면에 처한
기업들에게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13일 임시주총을 열었던 알렉스컴퓨터의 경우를 보자.

이 회사는 계열사인 알렉스테크와 알렉스네트의 영업을 양수하려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소액주주들의 주식매수요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75억원이란 거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거평과 거평패션을 합병하려 했던 대한중석도 소액주주들의 반대로 계획이
무산됐다.

그룹운명이 풍전등화의 상황인 거평으로서는 1백28억원이란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무리였다.

신원그룹의 경우도 소액주주들의 주식매수청구권 행사에 따른 2백78억원을
마련키 어려워 신원제이엠씨등의 합병계획을 포기했다.

이들 뿐아니라 합병이나 영업양수도 계획을 밝혔다가 주식매수청구권이란
덫에 걸려 예정을 바꾼 기업은 아직도 많다.

종업원들의 봉급까지 깎아야 하는 보통 상장기업들로서는 수십억
수백억원씩을 지급하는 것은 엄두조차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식매수청구권이 행사되면 거금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매수청구가격이 이사회 결의일전 60일간의 가중산술평균가격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주가가 끝없이 추락하는 상황에서 이같은 방식으로 계산된 매수청구가격은
요즘의 주가수준을 훨씬 웃돈다.

당연히 소액주주들은 조금이라도 비싼 값에 팔기 위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게 되고 기업들은 구조조정계획을 포기해야 하는 형편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이 오게된 근본적인 원인을 짚어보면 이유가 이들
기업에 있다고 보기가 어렵다.

증시가 붕괴되면서 이종목 저종목 가릴 것없이 거의 모든 종목의 주가가
함께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장래를 의심하는 외국인과 자금회전이 급한 기관투자가들이
무차별적으로 주식을 내다 판 탓이다.

심지어는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마저도 주가가 액면가를 밑돌아
유상증자조차 하기 힘든 형편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기업들에게 고가로 주식을
사들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태풍이 불어 농사를 망쳤는데 농부에게 책임을 지라는 것이나 다를 바없다.

더욱 문제는 구조조정계획이 무산돼도 소액주주들에게 별다른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소액주주가 혜택을 누리려면 구조조정계획 포기와 함께 주가가 올라줘야
하지만 실제는 그런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주식매수청구권제도는 누구에게도 큰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기업들의 앞길만 가로막고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한국은 구조조정에 실패한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져가는 처참한
상황에 있다.

주식매수청구권제도는 IMF체제를 벗어날 때까지 한시적으로라도 폐지하든지
아니면 기업의 부담을 극소화하는 방안이라도 시급히 마련돼야 할 시점이다.

< 이봉구 증권부장 bkle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