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회계는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생명인 신뢰를 잃어버린 탓이다.

금융기관 주식투자자 채권자 등 이해관계자 누구도 재무제표를 액면 그대로
믿지않는다.

그 책임은 정부당국 기업주 공인회계사에 있다.

정부는 회계기준을 수시로 바꾸는 임시방편에 습관이 들었다.

기업은 회계를 적당하게 분식하는 편법에 매달렸다.

공인회계사들은 한쪽 눈을 감아줬다.

그래서 경제위기의 책임 상당부분을 "회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부가 죽은 회계를 살려보겠다며 감리강화라는 "양약"과 감사인의 독립성
강화라는 "한약"을 처방할 조짐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단호히 의지를 보여야 하고 기업주와 회계법인은 어떤
쓴약이라도 달게 삼키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비로소 약효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보철강을 사례로 들어보자.

이 회사의 96사업연도 상반기 재무제표에는 부채가 4조2천4백60억원으로
적혀있다.

자본총계(2천2백43억원)의 18배가 넘는다.

평균대출금리를 10%로 봐도 연간 지급이자는 4천억원이 넘는다.

그러나 지급이자는 사채이자를 포함해 7백35억원에 불과하다.

이처럼 재무제표를 만드는 기업이 부실을 숨기기 일쑤인데다 이를
감시해야할 공인회계사가 눈감아 주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지난 한햇동안 증권감독원과 한국공인회계사회가 실시한 감리횟수는 모두
1백42회.

이중 39회(27%)에서 지적사항이 나왔다.

이와 관련해 53명의 회계사가 감사업무제한 등의 처벌을 받았으며 28개
기업이 고발 임원해임권고 등의 조치를 받았다.

재무제표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장부쯤으로 생각하는 기업주들의
잘못된 회계관이 제일 큰 문제다.

때로는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 때로는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그리고 때로는 주가를 조작하기 위해 이익을 부풀리거나 줄인다.

한국 회계는 고무줄 회계라는 비아냥이 그래서 나온다.

실제로 지난해말 결산에서 적자를 흑자로 둔갑시키는 등 부실회계처리가
적발돼 공인회계사의 지적을 받은 12월 결산법인만 30개에 달한다.

감사인의 독립성이 확보돼 있지 않다는 점도 부실감사를 부추긴다.

현행 감사인 선임방식은 기업이 회계법인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자유수임
제도다.

지난 81년 이 제도를 도입했다.

국제화에 대응하고 업계의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취지에 따른 것이다.

이런 자유수임제도가 도입취지와는 달리 분식결산과 부실감사를 양산하고
있다.

공인회계사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모임(공정한 사회구현을 위한
공인회계사들의 모임)을 준비하고 있는 이영석 회계사는 "회사가 감사인을
멋대로 교체할 수있는 우월적 지위에 서있다"며 "회계법인은 일감을
따기위해 기업주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회계법인의 벼락치기 회계감사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회계법인이 자산규모 5천억원정도의 회사를 감사하는데 걸리는데 기간은
길어야 1주일이라는게 회계사들의 고백이다.

이같은 수박 겉핥기식 감사로는 감사다운 감사를 기대할 수없다.

조용원 산동회계법인 회계사는 "미국의 경우 회계사들이 일년내내 회사에
상주하면서 회계처리를 감시한다"고 말했다.

정부당국도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회계기준을 수시로 기업입맛에 맞게 바꿔왔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말 외화환산손실 회계처리방법을 바꾼 것이 단적인 예다.

정부는 환율급등으로 기업 환차손이 급증하자 환차손을 이연자산으로 처리,
그해 손실로 반영하지 않고 여러해에 걸쳐 분할 상각할 수 있도록 회계처리
방식을 변경했다.

증권사들의 읍소에 주식평가손을 50%만 반영하도록 한 증권감독원의 지시도
일종의 회계처리변경이다.

황호승 프론티어M&A사 회계사는 "당장의 부실을 감추기 위해 정부가
분식회계를 묵인하고 있는 꼴"이라며 "외국인은 이같은 일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금융감독위원회는 감리를 강화해 부실감사와 분식회계를 뿌리뽑는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감리란 재무제표가 규정에 맞게 제대로 작성됐나를 증권감독원이나
한국공인회계사회가 검사하는 것.

금융감독위원회 안에서 논의되고 있는 회계제도 개선방안엔 회계법인끼리
서로 감리를 하는 제도(peer review)가 들어있다.

감리대상을 확대함으로써 감리를 받는 회사수를 늘리겠다는 취지다.

또 부실감사를 한 경영자와 공인회계사에 대한 처벌도 강화한다는 것이
금감위의 방침이다.

감리결과 재무제표가 엉터리로 작성됐다면 공인회계사들은 경우에 따라
"형사고발"조치도 당한다.

여기다 부실감사에 대한 "감사인의 처벌조항"을 상세히 규정한뒤 이를
엄격히 적용할 예정이다.

감리제도 강화와 함께 공인회계사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든다는 구상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사외이사중 일부를 회계전문가로 선임하도록 하고 현행 감사선임위원회를
감사위원회로 바꾸며 외부감사인은 의무적으로 감사위원회에 감사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감사위원회에 외부감사인(공인회계사)선임뿐만 아니라 내부감사인
(기업감사)의 선임과 해임에 대한 추천권을 줌으로써 감사의 독립성을
확보해야 된다는 것이다.

< 조성근 기자 truth@ >

[[ 분식회계 방식 ]]

<>재고자산을 실제보다 부풀린다.
<>외상판매를 가짜로 만들어 매출액을 늘린다.
<>자산가치를 실제가치보다 높게 평가한다.
<>못받게 된 외상매출금을 결손처리하지 않는다.
<>올해 비용을 다음해로 넘긴다.
<>기계장치 등 고정자산에 대한 감가상각비를 적게 계상한다.
<>임시로 들어온 자금이나 선수금을 매출액으로 잡는다.
<>단기채무를 장기채무로 표시한다.
<>있지도 않은 외상미수금을 만들어 영업수익을 늘린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