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 < 서울대 교수 / 종교학 >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사회에서는 광복이후 처음으로 종교인구가
감소추세를 드러냈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 현상을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다는 사실과
연계시켜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요즘 종교인구가 다시 늘어난다고 한다.

경제의 어려움이 그 까닭이라고들 말한다.

아직 실증적인 자료가 없어 그러한 이야기를 어느정도 사실로 여겨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그러리라는 예상을 할수 있다.

잘 알듯이 무릇 종교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지니고 있노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문화이다.

삶이 닫혀지고 꼬이고 부서지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몸부림할 때 그러한
삶이 열리고 풀리고 회복되는 출구를 마련해주고 그 가능성을 약속해주는
것이 곧 종교라고 일컫는 것이다.

불교가 주장하는 해탈도 그러한 해답을 제시하는 개념이고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구원도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모두 인간이 지금 여기의 부정적인 한계상황을 넘어서 새로운
긍정적인 존재양태를 지니고 다른 누리를 살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어려운 처지에서 일그러진 현실과 잃어버린
꿈 때문에 삶을 아프게 겪고 있는 많은 분들이 종교를 찾아 그 가르침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또 새로운 힘을 얻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스럽기도 하다.

종교가 있어 그래도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인구의 증가를 마냥 긍정적인 것으로만 여길 수 없는 염려도
없지 않다.

지난날 종교의 역사나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만나는 종교들을 살펴보면
그 해답의 기능이 그리 소박하고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교가 제시하는 해답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분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스스로 최선을 다해 그 현실을 극복하려
하기보다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여 요행스럽게 그 현실을 회피할 수
있기를 바라는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본다.

얼핏 이러한 모습은 겸손하고 순종적이며 봉헌적인, 이른바 돈독한 신앙의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실은 편리한 환상에 자신을 던져버리는
자기기만이다.

기왕의 자기를 죽이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새로운 주체로
태어나는 일이 신앙이지 그 책임을 어떤 절대적 존재에게 양여하고
타율적이고 숙명적이게 되는 것이 신앙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는 종교적 해답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황당한 기대나 노예적 의존에 빠져 자기를 잃는 딱한 모습을 적지 않게
만난다.

그러므로 종교인구의 증가가 이러한 사람들의 증가를 뜻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사회적 질병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인구의 증가현상은 여전히 의미있는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의 존재의미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묻는 사람들이
늘고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경제적 풍요 이후의 현상임을 유념하면 더욱 그러하다.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분명히 거품이었음에 틀림없지만, 이른바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동안 우리 자신들이 철저하게 외면했던 것은 "존재론적
물음"이었다.

삶의 의미를 묻지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다만 살기 위해 살아왔다.

종교조차 그러한 일만을 위해 기여했었다.

그런데 살만하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나 "어떻게"라는 수식도 없는 "하면 된다"나 "한다면 한다"라는
단정적인 선언이 마치 도덕인 양 자리잡았고 "돈 되는 일이라면"하는
조건문은 온갖 행위를 정당화하는 규범이 되고 말았다.

종교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왜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가를 묻지 않았고, 당연히 그
물음이 이끌어낼 존재의미의 구현을 유념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마치 땅거미에 퍼지는 연기처럼 재미라는 풍토가 대중매체를
통해 온 땅을 뒤덮었다.

우리는 말초적인 자극과 그 욕구의 충족만으로 마음껏 행복할 수 있을 듯 o
싶게 살아왔다.

이것이 "잘살던"우리 문화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려워진" 이제 우리는 새삼 종교에의 지향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잃은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겨우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쓰리고 아픈 현실의 한복판에 있지만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국가가 스스로 존재의미를 묻지 않는 한 어떤
위기극복의 노력도 피상적인 것일 뿐 그 노력자체가 또 다른 위기를 배태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종교가 불안해도 절실한 종교적 물음은 그것 자체로 건강한 것이다.

종교인구의 증가현상이 위기를 살아가는 뭇사람들에게 하나의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면 좋겠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