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계회의 (하) ]]

나는 61년 3월24일에 있었던 첫 정.재계회의 결과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그대로만 됐으면 경제발전을 최소 3~4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민주당 정부는 이미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재계도 프로젝트가 다양한 "태백산종합개발계획"을 갖고 있었다.

기업인들이 적극적인 지원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인적자원도
풍부했다.

그리고 이날 회의를 계기로 정.재계 협력시스템도 갖춰졌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빛바랜 청사진"이 되고 만다.

이날 정.재계회의에서 다듬어진 민주당 시절의 청사진을 들여다보자.

재계가 구호양곡을 내놓고 시국안정자금을 거출키로 하자 회의는 일순
활기를 띠었다.

김연수 회장을 비롯한 경제협의회 회장단은 "긴급제언"을 쏟아냈다.

우선 완성단계에 있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즉시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또 재계가 입안한 "태백산 종합개발 구상"도 관민합동 프로젝트로
시행하자고 제안했다.

김회장은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경제정책이 필요하다"며 정부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장면 총리와 경제각료들은 당장 시작하기는 어렵지만 미국에서
받는 원조액을 늘려 재원을 마련한뒤 다음해(62년)부터 5개년계획을 반드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장총리는 "미국에 연 8천만달러의 추가자금을 앞으로 3년간 공여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며 "이것만 확보되면 국토개발사업과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협의회측은 5개년계획은 62년부터 시작하더라도 미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 공장건설자금을 적극 교섭해줄 것을 재차 촉구했다.

평소 재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주요한 부흥장관 겸 상공장관도
재계를 지원했다.

그는 "기업의 운영자금 조달난이 심각하다"며 김영선 재무장관에게 통화량
확대를 주문했다.

김장관은 "기업 사정은 잘 알고 있지만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5개년
계획을 위해 물가 금리 환율 등 단계적 자율화 준비를 하고 있는 만큼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부탁했다.

이 말에 협의회측 참석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모 부회장은 "생일 잘 먹겠다고 기다리다 굶어 죽는다"는 속어까지 들며
물가에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내.외자를 총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몇개의 프로젝트만이라도 추진하는 것이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김연수 회장도 "안정도 중요하지만 실업에 지친 국민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지금이야말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라고 강조했다.

경기부양책을 촉구하는 재계와 통화와 물가 안정을 해칠 수 없다는
정부측의 열띤 토론이 계속됐다.

서로 입장차이는 있었지만 다음해부터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과
태백산종합개발계획 등을 실행에 옮기자는데는 의견을 같이했다.

이날 정.재계 회의 결과는 다음날자 신문에 잘 요약돼있다.

"경제정책을 전면 재검토-어제 밤 정부여당, 경협 연석회의-긴축
재정완화책 등 협의-구체적 방안 중앙정책위에 위임"이란 제목으로
대부분 1면톱 기사였다.

당시 이 회의에 걸고 있던 국민의 기대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재계가 거출하는 긴급구호양식과 시국안정자금으로 절량농가와
박봉에 허덕이는 지방공무원 경찰관, 그리고 청년단체 등을 지원한다.

둘째 국민의 희망을 북돋우고 발전의욕을 분출시키기 위해 속히 5개년
계획을 확정 발표하고 그중 자원이 마련되는 프로젝트는 곧 착수키로 한다.

셋째 경제발전 방향은 농.공 병진으로 하되 시급한 고용증대를 도모할 수
있도록 노동집약적 보세가공 등 수출산업을 적극 개발 지원한다.

수출촉진을 위해 수출입링크제를 연구 검토한다.

넷째 자금 및 기술도입 등 대외협력에 공동 노력한다.

미국은 주로 정부가, 일본은 이미 연고가 많은 재계가, 독일 등 기타
지역은 정부와 재계가 함께 추진키로 한다.

그리고 정부와 경제협의회측은 이같은 연석회의를 정례화하기로 약속했다.

회의는 4시간이 지난 밤 11시에야 끝났다.

그날밤 통금시간을 코앞에 둔 시각에 반도호텔을 나서는 경제협의회
회장단은 모두 흐뭇한 표정들이었다.

술 좋아하는 김연수 회장의 "한잔" 제의를 거부하기 어려웠다.

희망에 젖기는 장면 정부측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부터는 뭔가 제대로 될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민주당 시절의 정.재계회의는 결국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만다.

"모범생"으로만 짜여진 장면 정부는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정.재계가 힘을 합쳐 뭔가 다른 것을 내놓기에는 5.16쿠데타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