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학길 <미국 존스홉킨스대 초빙교수>

새정부의 장차관급 인사가 마무리되었는 데도 이곳 워싱턴에서 보는 한국
경제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불안하기만 하다.

총리 인준을 둘러싼 정치적 교착상태, 신임 장차관급 인사결과에 대한
실망, 부실금융기관 처리부진및 일반적인 개혁의지 실종분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이곳에서 이번 학기에 주관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금융위기"
세미나에 초대된 가이트너 미 재무차관보는 지난 9일 "한국정부가 지금까지
비교적 잘 대응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구제도가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old system still in play).

현시점에서 개혁 성공의 전망은 극히 불투명하며 낙관은 시기상조"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이 한국의 신용등급을 다시
하향조정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해 있다.

서울 주식시장에서는 외국인들의 주식매입물량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외국인 직접투자의 유입규모는 작년의 20%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만일 이런 상태가 지속되고 3~4월에 몰려 있는 일본 은행들의 단기외채
연장실적마저 부진하게 되면 제2의 환란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

교착상태에 있는 정치권에서의 힘겨루기만 비방하며 속수무책으로
기다릴수는 없다.

이미 배에 구멍이 난지 오래고, IMF체제는 이 구멍을 임시조치로 막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 손으로 어떻게 해서든 배를 대폭 수리해 다시 항해를 계속 해야 될
처지에 있다.

이제 막 구성된 새정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물가는 지난달 이미 1.7%(연율 20.4%)나 뛰고 있으며 환율과 금리는
예상보다 훨씬 불안한 상태다.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 노동부장관은 실업자가 하루 1만명씩 늘어나고
있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새정부가 제2의 환란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환율안정에 최우선적
(단기)정책목표를 두어야 한다.

물론 물가도 중요하고 금리도 중요하지만 실업자문제는 더욱 심각한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남미 국가들이나 1995년 이후 멕시코가 경험한대로
이들 거시지표들을 거의 동시에 다 바로잡을 수는 없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한국경제가 IMF아래 있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단기정책목표를 환율안정에 두고
그것을 어느정도 달성하게 되면 물가와 금리안정은 어느정도 시차를
두고 따라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사태를 환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환율이 안정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물가가 안정될수 없고, 또한
금리역시 비정상적일 정도의 고금리체제가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원화환율은 정부가 원하는대로 빨리 1천4백원선 또는
1천3백원선으로 안정되지 않는가.

외채 만기조정협상이 완결되면 환율이 곧 안정될 것으로 기대한다면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외채 만기조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 대기업들의
현지금융과 역외금융, 그리고 많은 대기업및 금융기관 중소기업들의
해외투자에 따른 결손처리, 운영자금조달 등 외화에 대한 초과수요가
외환시장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는 기업들의 현지금융규모를 4백억달러 정도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으나 이미 부실화된 해외투자액 등을 포함하면 이 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하면 금융기관이 아닌 기업들의 해외자산및 부채관련 부실규모의
정도에 따라 앞으로 환율안정의 전망이 좌우될 것이며, 정부는 정확한
통계를 가질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기업의 해외자산및 부채관리는 정부규제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또한 이미 벗어난 상태에서 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지난 2월7일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가졌던 세미나에서 나이스 IMF실무
협의단장은 "IMF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꼭 고금리를 고집하겠느냐.

고금리가 가져올 집단도산 대규모실업 등의 폐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환율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고금리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그나마
들어오던 유일한 외화공급인 외국인투자가 돌아설 것이고 제2의 환란이
불가피해지며, 그때는 더 이상의 국제기관에 의한 자금공급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현재의 물가상승과 실업증가는 과거의 고평가된 환율, 억압적 저물가정책,
그리고 지연된 노동시장개혁의 비용을 우리 정부가 환란이후에 한꺼번에
물고 있는 것으로, 아직은 남미가 경험한 것의 3분의1도 안되는 셈이다.

새정부가 북풍조사, 경제청문회, 재벌개혁 등 수많은 개혁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해하지만 단기정책의 초점은 외국인투자의 유치와
부실금융기관(기업)의 조속한 정리로 외자공급의 확대와 잠재수요의
축소에 맞추는 것이 시급하다.

< 위싱턴에서 >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18일자).